회복 가시화되면 골디락스 재현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각국의 성장과 물가 간 관계를 보면 디스인플레이션 현상이 뚜렷하다. 미국은 성장률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지만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침내 재닛 옐런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조차 물가가 오를 가능성보다 저물가가 경제 활력을 떨어뜨릴 가능성을 우려했다.
유럽은 더 심하다. 핵심국 경기 회복세가 주변국으로 확장되는데도 물가상승률은 오히려 둔화되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디스인플레이션 성격과 추가 양적완화 추진 문제를 놓고 실랑이를 벌일 정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성장과 물가 관계에서 총공급 곡선(AS·Aggregate Supply)과 총수요 곡선(AD·Aggregate Demand)을 이용해 디스인플레이션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AS가 우측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AD가 우측으로 이동하더라도 AS가 더 많이 이동하는 경우다.
디스인플레이션을 AS가 좌측으로 이동해 성장률이 떨어지는 데도 물가가 올라가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반대 현상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2차 오일쇼크 이후 유가가 급등하자 AS가 좌측으로 이동해 1980년대 초반 미국 경제에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종전에 볼 수 없던 성장과 물가 간 관계가 나타났다.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보기술(IT)이나 셰일가스 개발뿐 아니라 ‘월마트 효과’도 성장과 물가 간 전통적인 관계를 흐트러뜨리는 요인으로 새롭게 꼽힌다. 최근처럼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돼 모든 상품이 넘치는 초과 공급 시대에공급자인 기업은 가격 파괴나 인하로 대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기가 회복돼도 물가가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증강현실과 초연결 시대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직접구매(직구)’가 가능해진 것도 디스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는 요인 중 하나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소비자와 생산자 간 직거래가 가능해짐에 따라 각종 거래비용이 크게 줄어들어 종전과 같은 성장을 하더라도 인플레이션 압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Fed를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이 고민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전통적인 성장과 물가 간 관계가 흐트러지는 통화정책 여건에서 물가가 안정됐다고 계속 제로(0)금리나 양적완화를 오래 끌고 가다간 자산시장 거품을 유발하거나 특정 시점을 지나면 갑작스럽게 경제주체의 기대 인플레이션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때 선제성이 중시되는 통화정책의 특성상 뒤늦게 금리를 올리거나 유동성 회수에 나선다 하더라도 의도했던 효과를 거둘 수 없게 된다. 오히려 통화정책 추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경기순응성(procyclicality)’을 심화시킬 우려가 높다. 순응성이란 금융시스템이 경기변동을 증폭시켜 불안을 초래하는 금융과 실물 간 상호작용 메커니즘을 말한다.
즉, 회복기에는 자산가격 상승과 위험선호도 증가로 은행 대출이 늘면서 잠재적 금융 부실이 커지는 반면 하강기에는 실물활동 위축, 자산가격 하락, 위험회피 성향으로 은행대출이 급감하면서 금융 부실이 가시화된다. 이때 경기순환주기는 정점(peak)이 더 높아지고 저점(trough)이 더 떨어져 진폭이 커지면서 특정국 경제 안정성이 많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전통적인 성장과 물가 간 관계를 감안해 설정해 놓은 물가목표선을 하향 조정해야 한다는 소위 ‘인플레 타기팅’ 논쟁이 거세게 일고 있다. 대부분 선진국 중앙은행의 물가목표선은 2%다. 우리는 3%를 중심선으로 상하 0.5%포인트 범위 내에서 밴드 폭을 설정해 통화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인플레 타기팅’ 논쟁은 통화정책 운용에서 아주 중요하다. 간단한 예로 현재 물가상승률이 1.5%라고 할 때 물가목표선을 2%로 설정해 놓은 상황에서는 물가에 부담이 없기 때문에 제로 금리나 양적완화를 그대로 추진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물가 목표선을 1%로 하향 조정했다면 물가가 불안해 금리를 올리거나 유동성을 회수해야 한다.
디스인플레이션은 증시 입장에서도 의미가 크다. 일부 우려대로 저물가가 모처럼 회복한 경제활력을 떨어뜨린다면 ‘D공포’가 현실화된다. 하지만 회복세가 지금보다 가시화되면 1990년대 후반 신경제 시대처럼 저물가 속에 고성장이라는 골디락스 장세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지금 바로 그 기로에 있는 셈이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