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라는 게 결국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아닌 남, 그러니까 직원들과 소비자들, 소속된 사회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가진 리더가 이끌어야 합니다. 그게 기업가 정신이고 이를 온전히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면 같은 생각과 DNA를 가진 2세, 3세에게 기업을 물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스키를 타다 스노보드를 타는 젊은이하고 부딪쳐 인대가 파열됐습니다. 좀 절룩거려도 이해해 주세요.”

담백한 두부가 일품이라는 남양주의 ‘기와집순두부’에서 저녁 약속을 잡은 지난달 19일. 박유재 에넥스 회장(사진)이 지팡이를 짚고 차에서 내렸다. 박 회장은 겨울 끝자락인 지난 2월 말 강원도 용평스키장 레드코스(상급자 코스)에서 스키를 타다 부딪쳐 오른쪽 발목을 다쳤다. “이 동네 공기가 좋다”며 악수를 건넨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지팡이를 내려놓고 꼿꼿이 선 채 자연스럽게 여러 포즈를 취했다.

그는 “다닐 때 지팡이가 익숙하지 않아 불편한 정도”라며 “수술을 받으면 곧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지난 1일 인대 파열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식당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자마자 박 회장은 “늘 먹던 걸로 달라”고 직원에게 말했다. 따끈한 순두부가 큰 사발에 담겨 밥, 반찬과 같이 나오는 순두부 백반이었다. 생두부와 제육도 함께 상에 올랐다. “이 돼지고기는 푹 삶았기 때문에 지방이 적고 입에 넣으면 살살 녹아요.” 박 회장은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몸이 건강해지는 법”이라며 “두부와 제육을 같이 먹어보라”고 권했다.

60세에 스키 배워

언제부터 스키를 탔는지 궁금했다. “한 20년 됐지. 젊었을 때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육십이 넘고 보니까 어린 애도, 여자도 다 타더라고. 저걸 내가 왜 못 타나 싶어 둘째 아들한테 강습을 받고 바로 올라갔습니다. 처음엔 한 50번 굴렀어요. 요령을 익히고 나서는 쌩쌩 달리고 있습니다.”

20년 전에 스키를 시작했으니 당시 박 회장의 나이는 60세였다. 골프에 대해 묻자 박 회장은 “최고 기록은 75타”라고 말했다. “여러 번 (75타를) 쳤는데, 사실 골프는 셋째 아들(박진우 엔텍 사장)이 잘 칩니다. 앨버트로스도 했고 이글은 20번 넘게 했다니까요.”

박 회장은 오리표싱크로 국내에서 ‘입식 부엌문화’를 선도했다. 1992년 회사 이름을 에넥스로 바꾼 뒤에는 주방가구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가구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그는 71세였던 2005년 말 차남인 박진호 사장에게 에넥스 대표이사직을 맡겼다. 하지만 차남이 추진한 새 사업이 제대로 안 되고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중국법인장으로 나가 있던 장남 박진규 부회장을 불러들여 회사 경영을 맡겼다. 차남은 싱크대와 붙박이장 등을 만드는 계열사 엔비스 사장으로 물러났다. 삼남인 박진우 씨는 주방가구와 욕실 제품을 만드는 계열사 엔텍 사장이다.

장남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박 회장은 “10여년 전에 형제끼리 재산 다툼을 벌인 사례들을 모아 만든 스크랩북 맨 앞에 세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고 써놓고 세 아들에게 모두 사인을 받았다”며 “첫째,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둘째, 돈 욕심 갖지 말아야 하고 셋째, 마누라도 욕심을 부리지 않게 잘 다독여야 한다고 써놨다”고 했다.

그는 “이걸 아들들에게 읽게 하고선 기업가정신을 갖추고 정열적으로 일하되 직원들에게 행복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는 리더라는 걸 명심하라고 말한 뒤 회사를 맡겼다”며 “큰형한테 에넥스 경영을 맡긴 것에 대해 다들 수긍했다”고 말했다.

110억원 사재 출연

박 회장이 생각하는 기업가정신은 무엇일까. “기업이라는 게 결국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남, 그러니까 직원과 소비자, 소속된 사회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가진 리더가 이끌어야 합니다. 그게 기업가정신이고 이를 온전히 영속적으로 유지하려면 같은 생각과 DNA를 가진 2세, 3세에게 기업을 물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한 거죠.”

방금 부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두전이 나왔다. “따뜻할 때 들라”며 전을 권하는 박 회장에게 자녀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 “세 아들이 고등학생, 중학생이었을 때 불러다 놓고 일찌감치 얘기했습니다. 너희는 나하고 경쟁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너희가 내 나이가 됐을 때 나보다 더 훌륭하게 되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지금은 맞먹을 생각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기죽지도 말아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린 너희가 대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어요.”

박 회장은 에넥스가 3년 연속 적자를 내는 등 경영이 어려워지자 2012년 시가 11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회사에 출연했다. 그는 “인생이란 게 공수래공수거 아니냐”며 “개인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려고 했던 건데 회사가 어려움에 빠졌고 이 돈이 있으면 잘 해나갈 수 있겠다 싶어 주저 없이 기증했다”고 말했다.

에넥스는 박 회장의 사재 출연 이후 사업구조를 특판(아파트용 대량 계약) 위주에서 일반 소비자 대상으로 바꾸고 대리점을 챙기는 현장 경영을 하면서 지난해 매출 2336억원에 영업이익 30억원을 올렸다. 2012년 매출 1968억원, 영업손실 109억원과 비교하면 실적이 크게 좋아졌다.

아령 들기 하루 111번

탱글탱글한 도토리묵이 나오자 박 회장은 “이게 맛있다”며 집어 들었다. 박 회장은 소식하는 편이었다. 순두부에 간장을 반 숟가락 정도 넣고 국물 마시듯 먹었지만 흰 쌀밥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11대 국회의원(1981~1985년) 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 “봉사하려고 국회의원이 된 것인데, 수백표를 끌어다줄 테니 돈을 달라고 하면서 찾아오는 정치브로커들이 많았습니다.”

두부를 겉절이 김치에 싸서 한 점 집어 든 박 회장은 “두부엔 막걸리”라며 반주를 권했다. 두 시간이 흘렀지만 등받이가 없는 방바닥에서도 여전히 꼿꼿했다. 양반다리를 고쳐 앉지도 않았다.

“건강은 식품이랑 운동, 그리고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해요. 아침마다 수십종의 곡물과 채소를 갈아 만든 생식을 요구르트에 타서 마십니다. 아내가 챙겨주는 무즙, 비타민, 견과류도 먹고요. 밤마다 스트레칭하고 눈과 배에 진동 안마기를, 허리엔 레이저 기기로 혈액순환을 시켜요. 운동은 2㎏짜리 아령 두 개를 한 번에 111개씩 합니다.” 운동 횟수를 111번으로 정한 이유를 묻자 “카드 게임에서 에이스(A) 석 장을 잡으면 좋잖아요”라고 말했다.

바이오 등 신사업은 2·3대 몫

박 회장이 개발한 오리표싱크는 아파트 붐이 일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루종일 부뚜막에 쪼그려 앉아 불편했던 주방을 입식 부엌으로 선진국화하는 게 제 목표였어요. 여성들을 부뚜막에서 해방시켜 산업 생산성이 높은 가용 인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자만 일해서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입식 부엌을 수출해서 외화도 벌어야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는 비전을 품고 시작했어요.”

그는 스웨덴 가구업체인 이케아가 올해 말 국내에 들어오는 것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위기는 동시에 기회인 법이에요. 자극을 받아야 더 분발하고 배우면서 단단하게 클 수 있는 거죠. 우리는 부엌가구 중심이기 때문에 이케아와 겹치는 것도 적은 편이고. 큰 기업이 국내에 들어오면 보고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는 측면에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식사시간이 3시간을 훌쩍 넘었는데도 박 회장은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며 “거기에 감사할 따름이고 바이오나 환경 쪽으로 사업을 확대하는 계획은 2대, 3대가 이어갈 몫”이라고 말했다.

■ 에넥스의 야심작 주방가구 ‘포레스트’

[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유재 회장 "탐욕 부리지 않겠다는 확약받고 아들에 회사 맡겼죠"
에넥스가 3년 만에 야심작으로 내놓는 프리미엄 주방가구 ‘포레스트’. 천연 무늬목을 일정 온도에서 숙성한 훈증 무늬목으로 만들어 자연스러운 색감과 나무의 질감을 살렸다. 유칼립투스 무늬목을 원료로 써 내구성이 뛰어나다. 숙성 과정에서 유해물질이 사라진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 박유재 회장의 단골집 남양주 '기와집순두부'
구수한 순두부 백반…생두부에 돼지고기 제육 '별미'
[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유재 회장 "탐욕 부리지 않겠다는 확약받고 아들에 회사 맡겼죠"
한옥 건물이 멋스러운 기와집순두부(남양주시 조안면)의 대표 메뉴는 따끈한 순두부와 밥, 반찬이 함께 나오는 순두부 백반이다. 콩나물과 시금치 무침, 묵은지, 멸치볶음, 파래 무침 등 정갈한 반찬이 따라 나온다. 1인분에 7000원이다. 쌀과 콩, 배추, 고춧가루, 오리, 돼지고기 모두 국내산을 쓴다. 고소한 콩비지로 만든 콩탕도 유명하다. 생두부와 삶은 돼지고기를 함께 맛볼 수 있는 메뉴는 2만원이고 툭툭 잘라 먹는 전통생두부는 9000원. 제육만 따로 나오는 메뉴는 2만5000원이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유재 회장 "탐욕 부리지 않겠다는 확약받고 아들에 회사 맡겼죠"
식사 때 같이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도토리묵, 녹두전과 파전, 두부김치는 각각 1만2000원에 맛볼 수 있다. 안주류로 먹을 수 있는 북어 양념구이(8000원), 두부를 구워서 고소하게 먹을 수 있는 군두부(1만2000원)도 추천할 만하다.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비빔밥(7000원)도 있다. 주말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이 잦다. (031)576-9009

■ 박유재 회장

▶1934년 충북 옥천 출생
▶1958년 국제대 화학과 졸업
▶1963년 제일도기, 유일장학회 설립
▶1971년 서일공업사 설립
▶1976년 오리표싱크로 법인 전환
▶1978년 황간공장 준공
▶1980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수료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1986년 엔텍 설립
▶1992년 오리표싱크에서 에넥스로 상호 변경
▶2010년 베트남 현지 공장 준공

남양주=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