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삼킨 러시아, 심한 '경제 복통'
크림반도 합병에 성공한 러시아가 주가 하락, 루블화 약세, 국가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동시다발적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서방과 갈등을 겪기 이전부터 경기 하락세를 보였던 러시아가 크림사태 이후 외국인 투자자본이 빠른 속도로 이탈하면서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솜방망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서방의 경제 제재도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가운데 미국 독일 등 주요 7개국은 24일(현지시간) ‘헤이그 선언’을 통해 주요 8개국(G8)에서 러시아를 퇴출시키는 동시에 경제제재 조치를 더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엑소더스’…자본 유출 심각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편드평가기관인 EPFR글로벌의 말을 인용, 올 들어 이달 20일까지 러시아 주식과 채권시장에서 55억달러가 빠져나갔다고 보도했다. 지난주 영국 시장조사업체 캐피털이코노믹스도 보고서를 통해 올 1분기에만 러시아에서 700억달러의 자본이 유출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작년 러시아의 총 자본유출 규모인 630억달러보다 많은 수치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러시아에서 빠져나가는 자금이 최대 1300억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 국영은행 스베르방크는 1분기 자본 유출이 1000억달러에 이를 경우 러시아 성장률이 제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이날 미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국제방송 보이스오브아메리카(VOA)가 전했다.

최근 미국의 제재 대상에 포함된 러시아 SMP은행은 “워싱턴이 주요주주 제재에 나서면서 90억루블(약 2조4800만달러)의 예금이 빠져나갔다”고 이날 발표했다. 모스크바 국영은행인 VTB캐피털은 러시아가 2, 3분기에 깊은 침체에 빠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주가지수·루블화 가치 ‘추풍낙엽’

각종 금융시장 지표도 휘청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MICEX지수는 올 들어 13.7% 떨어졌다. 같은 기간 MSCI이머징마켓 지수 하락폭(5%)보다 훨씬 크다. 루블화 가치도 올 들어 미 달러화 대비 9% 하락했다. 러시아 경제성장률은 이미 지난해 1.3%로 추락한 상태다. 지난 10년간 연평균 성장률 7%의 5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러시아 경제부는 이날 올 2월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0.3%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루치르 샤르마 모건스탠리 신흥시장 부문 대표는 지난 23일 월스트리트저널 기고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크림반도 합병이 러시아 경제에 미칠 영향을 언급하며 ‘포템킨(Potemkin) 경제’라는 표현을 썼다. 포템킨은 1900년대 초 러시아 흑해 함대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전함. 1905년 흑해 함대 소속 포템킨호 수병들은 썩은 소고기로 만든 수프에 분노, 전함을 장악하고 시민과 봉기를 일으켰다. 러시아가 군사적 우위를 앞세워 크림반도를 차지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고 평가되는 이 사건처럼 푸틴 대통령도 경제난에 민심 이반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크림반도 합병이라는 지정학적 승리가 러시아 경제를 허물어뜨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서방의 경제 제재를 ‘모기에 물린’ 정도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충격파가 커질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미르체아 지오아나 루마니아 외무·경제장관은 “미국·유럽연합의 경제력과 러시아의 경제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며 “푸틴의 공격에 대한 대가는 결국 러시아 국민이 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정선/이심기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