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이 점점 치킨게임(무한경쟁) 양상을 띠고 있다. 삼성이 물량 경쟁을 시작한 것 외에도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은 하드웨어 스펙 경쟁을 자제하고 신제품 판매 시기를 앞당기는 동시에 제품군 확장에 나섰다. 경쟁사의 운영체제(OS)를 도입하는 등 시장의 금기도 점차 사라지는 분위기다. 시장 성장세가 주춤해져 무한 경쟁 체제로 접어들자 생존을 위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버리기 시작한 것이란 분석이다.
(1) 스펙 경쟁 끝났다
“하드웨어 스펙 경쟁 시대는 끝났다.” 지난달 24일 삼성전자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갤럭시S5를 공개하자 이 같은 진단이 나왔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메모리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부품이 갤럭시S4와 비슷하거나 크게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AP는 예상됐던 64비트 AP 대신 기존 32비트 제품을 장착했다. 메모리도 유력했던 3GB(기가바이트) D램이 아니라 2GB D램을 채택했다.
생산량은 대폭 늘리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베트남 북부 타이응우옌성 2공장을 준공하고, 조립라인을 설치 중이다. 이달 월 100만대 생산규모로 가동을 시작한 뒤 계속 늘려 내년 월 1000만대 생산능력을 갖출 계획이다. 이는 세계 최대 스마트폰 공장인 하노이 북부 박닌성 제1공장과 비슷한 규모다.
지난달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선 25달러짜리 초저가 스마트폰이 나오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이런 상황을 양산 기술과 가격 경쟁력으로 돌파한다는 전략이다. 스펙을 높여 더 비싼 스마트폰을 만들기보다 가격을 낮춰 판매량을 늘리는 전략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스마트폰 판매량이 올해와 내년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2) 제품공개 주기 깨져
스마트폰 신제품 판매 일정도 당겨지는 추세다. 빨리 내놔 많이 팔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는 당초 3~4월 내놓을 예정이던 갤럭시S5 공개 일정을 2월로 당겼다. 애플도 신제품 아이폰6를 올 7월 선보일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애플은 매년 9월 신제품을 공개해왔다. 그러나 올해는 개발 주기를 당겨 7월에 스마트폰 신제품을 내놓은 뒤 연말 성수기에 스마트폰이나 새로운 카테고리의 제품을 추가로 발표할 것이란 관측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스마트폰 스펙만으로 더 이상의 혁신을 보여주기 어려워지자 제품군과 판매량을 늘리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3) 애플 ‘손 안의 폰’ 포기
다양한 제품군을 갖추기 위해 ‘나만의 정체성’을 버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애플이 대표적인 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폰’ ‘프리미엄 스마트폰’ 전략을 포기했다. 애플 아이폰6는 화면이 커질 것으로 알려졌다. 전망은 4.7~5.5인치대로 다양하다. 모두 아이폰5S(4인치)보다 크다. 애플은 그간 스티브 잡스 창업자가 고집한 화면 크기를 따랐다. 잡스는 스마트폰이 3~4인치대로 작아 한 손에 쥐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화면 스마트폰이 인기를 끌자 애플도 더 이상 ‘잡스 철학’을 고수할 수 없게 됐다.
애플은 지난해 보급형 아이폰5C도 내놨다. 삼성전자가 다양한 화면 크기와 가격대의 스마트폰을 공급해 점유율을 높이는 데 성공하자 정체성을 버리고 반격에 나선 것이다.
(4) 경쟁사 OS도 쓴다
경쟁사의 OS를 탑재한 스마트폰도 내놓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에 흡수될 예정인 노키아 휴대폰사업부는 MWC에서 첫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노키아X’를 선보였다. MS의 윈도 OS를 쓰지 않고, 경쟁사인 구글의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한 스마트폰을 내놓은 것이다. 스마트폰 이용자들이 익숙한 안드로이드 환경을 제공하고 안드로이드 개발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고객 확보를 위해서라면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는 경쟁 현실을 보여준다.
김현석/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