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 중 문화재 나오면 발굴·복원·전시장 마련까지 건축주가 비용 전액 부담
제대로 된 시설 못 만들고 완공후엔 방치되기 일쑤
음료수 캔·종이컵 뒤엉켜 도심의 흉물로 변한 곳도
하지만 이곳은 건물공사 당시 발굴한 각종 유구(遺構·주거지, 무덤, 저장고, 건축물,사원 등 인간활동으로 만들어진 잔존물) 등을 보존하기 위한 유적전시관이다. 책상이 놓인 유리바닥 아래엔 16세기 조선 초기의 건물터가 있다. 건물터를 자세히 살펴보려 했지만 조명이 꺼져 있는 데다 유리에 남은 긁힌 자국 탓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벽면에 설치된 유물 안내판과 발굴 현황을 설명하는 텔레비전 스크린도 꺼져 있었다.
#2. 서울 청진동 KT사옥 뒤편. 이곳에는 조선시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앞을 지나 흐르던 중학천의 석축을 복원한 유적이 있다. 물길조성공사 중 발굴한 원래의 중학천 석축과 인근 재개발 현장에서 출토된 돌들을 이용해 10m 길이의 석축을 복원했다. 하지만 2m 높이의 석축에는 담배꽁초와 종이컵, 음료수캔이 잔뜩 버려져 있었고 바닥에는 마른 잡초가 무성했다. ‘중학천 석축 유구’라는 안내문을 보고서야 조선시대 유적임을 알 수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문화융성을 4대 국정기조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문화예산을 정부 재정의 2%까지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대선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해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문화재를 무료로 개방키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의욕과 달리 현실은 너무 동떨어져 있다. 건설 현장에서 발굴된 귀중한 수많은 문화유산이 부실 관리와 보여주기식 복원으로 신음하고 있다.
◆복원 규모만 협의…관리지침 전혀 없어
공사 중 문화재가 발견되면 본격적인 발굴조사에 착수한다. 국립문화재위원회 위원들과 문화재청이 추천한 전문가 3인 이상이 현장을 방문해 조사를 통해 발굴된 문화재의 가치를 살핀 뒤 문화재위원회와 건축주가 협의해 문화재 복원 방안을 결정한다. 지난해 1313건의 지표조사를 해 이 중 509곳이 발굴조사까지 진행됐고, 보존 조치된 유적은 모두 35곳이었다.
사대문 안의 경우 2003년 서울 청진동 르메이에르빌딩 부지에서 조선시대 관영시장인 육의전 건물터와 피맛길 터가 발굴된 이후 모든 건설 현장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도심에서 문화재 조사가 이뤄진 첫 사례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복원된 문화재에 대한 관리·감독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파고다타워 종로 빌딩은 지난해 11월 종로구청과 문화재청이 함께 현장 점검을 하고 빌딩관리사무소 측에 행정지도를 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점검을 담당했던 나신균 종로구청 문화재관리팀 주무관은 “관리사무소 측이 ‘스터디존을 새로 마련하는 동안만 임시로 전시관을 공부 공간으로 꾸민
만큼 1주일 뒤 책상들을 다 치우겠다’고 말했었다”며 “문화재청에서 따로 마련해준 관리 가이드라인이 없어 종로구에 있는 복원 유적 10여곳에 대한 관리 근거가 없다”고 털어놨다. 점검에 나섰을 때만 해도 건물터 위에 설치된 유리바닥에는 책상을 두지 않았지만 점검이 끝나자마자 유적 위에까지 책상들이 들어찼다.
◆발굴조사비 2000억 vs 정부지원 80억
문화재 발굴에서 복원·전시·관리에 드는 모든 비용을 건축주가 부담해야 하는 현실이 관리 부실과 졸속 복원을 불러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지면적 792㎡ 이하, 건축면적 264㎡ 이하 주택건설 공사의 경우 최대 3000만원까지 발굴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대부분 건물은 지원이 없다.
지난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2189억원. 이 중 문화재청이 지원한 금액은 고작 80억원에 불과하다.
이은석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연구관은 “올해 지표·발굴조사 지원 예산은 40억원 많은 120억원이 책정됐지만 모든 조사를 지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문화재도 제대로 매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건설 현장에서 발굴된 유물들까지 책임지기는 힘든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직 문화재위원회 위원은 “발굴된 유물들의 복원 방안을 건축주와 협의해야 하는데 모든 비용을 건축주가 부담하는 상황에서는 최선의 복원 방안을 밀고 나가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본 중국은 국가가 전액 지원
문화재 전문가들은 목조 건축물이 대부분인 한국의 전통 건축문화를 고려해 개발과 복원이 병행 가능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과거에는 건물을 지을 때 기존에 있던 집터를 그대로 남겨두고 그 위에 흙을 붓는 방식으로 터를 닦았다”며 “광화문 인근만 해도 조선시대 초기에 비해 지면이 2~3m는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600년 조선왕조의 수도였던 지금의 사대문 안의 경우 건축물을 짓기 위해 조금만 발굴해도 유물이 쏟아져나오곤 하는 까닭이다.
국회는 지난해 12월 매장문화재 보호법을 개정해 사업 규모 및 성격 등을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건설공사에 대해 문화재 지표조사 비용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하지만 법 개정이 실제 지원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예산 확보 등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
영국, 덴마크, 핀란드 등 유럽 국가들도 사업시행자가 지표·발굴 조사 비용을 부담하는 게 원칙이나 △공공목적의 발굴 △사업시행자가 비영리단체인 경우 △중요 문화재 발굴 등에 해당하면 국가가 조사 비용을 일부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조사 비용을 사업시행자와 국가가 공동으로 부담한다. 일본의 경우 지표조사 비용은 전액 국가가 지원하며 민간주택과 공공시설에 대해선 국가가 정밀발굴 조사비용도 모두 부담하고 있다. 중국은 모든 지표·발굴 조사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