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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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후 한 달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한 시간이었다. 소비자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무심코 적어낸 내 정보가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수천 군데로 퍼진다는 점을 알게 됐다. 합법적으로 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은 물론 불법적으로 유출돼 범죄에 악용되고 있다는 점도 피부로 느꼈다. 휴대폰에 수시로 뜨는 각종 대출 권유 문자 등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절감했다.

생활 패턴의 변화도 뒤따랐다. 푼돈에 정보를 알려주고 기업 마케팅에 노출되느니 제값 내더라도 안전하게 숨어 살겠다는 ‘은둔형 소비자’가 급증했다.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들은 척도 안하던 사람들이 자진해서 변경한다. 아는 사람 문자도 제대로 확인 못하는 ‘불안족’까지 생겨났다.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막으려면 스스로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반성에서 나타난 변화다.

◆“내 정보 내가 지켜”…‘은둔형 소비자’ 증가

직장인 임효진 씨(32)는 서울 명동의 회사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명함 이벤트에 늘 참여했다. 제주도 여행이나 상품권 등을 내건 행사다. 하지만 이제는 밥을 먹고 나면 계산만 하고 바로 나온다. 정보 노출이 찜찜해서다. 비단 임씨뿐만이 아니어서 투명 항아리에 쌓여 있는 명함이 눈에 띄게 줄었다.

명함 1장 주는 것도 부담스러우니 회원 가입은 말할 것도 없다. 소규모로 여성의류 전문 인터넷쇼핑몰을 운영하는 이모씨(29·여)는 “회원 가입을 받을 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는데 신규 회원 수가 확연히 줄어든 데다 신용카드 결제 대신 무통장 입금을 하는 고객도 늘었다”며 “고객정보 유출 사건 이후 개인정보 보호나 관리에 대한 불신이 확실히 커진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씨는 “대기업이 아니다 보니 전산 시스템 정비에 한계가 있어 최근 사회 분위기 여파로 매출에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이처럼 정보 노출을 꺼리면서 ‘은둔생활’을 하는 이유는 정보를 주면 해당 업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제휴를 맺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객들의 정보를 넘겼다. 롯데카드의 경우 회원들의 정보를 제휴사 160곳 이상에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화점, 영화관, 커피숍부터 성형외과, 여행사 등 어지간한 업종은 다 포함돼 있다. 롯데카드에서 정보를 받은 곳이 또 어느 곳으로 넘기는지는 추적조차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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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부터 변경 사례 급증

카드사 정보 유출 사태는 내 정보가 불법적으로 거래된다는 점도 깨닫게 했다. 카드사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이미 정보가 유출됐다는 것이다. 정보 유출을 기정사실로 본다면 바꿔야 할 것이 천지다. 정보 유출 신용카드 3사가 확보한 전체 카드 수의 10%가 넘는 431만장이 재발급됐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사고 이후 카드 재발급뿐만 아니라 인터넷 홈페이지 비밀번호 변경 사례가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네이버 등 주요 포털 사이트의 인터넷 카페에서는 때아닌 회원 수 감소를 경험해야 했다. 활동이 뜸한 소형 카페는 절반 이상 줄어든 곳도 있다. 방문 횟수가 적은 카페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탓이다. 지난 주말에 인터넷 카페 5곳에서 탈퇴했다는 임성수 씨(28)는 “불안한 마음에 관계를 끊기는 했지만 카페지기가 내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데 별일 없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는 개인정보 불법거래의 실상이 속속들이 알려지면서 정도를 더해가고 있다. 불법 정보거래 시장은 그만큼 심각하다. 정보를 팔아 먹고사는 브로커들이 판을 치고 있다. 브로커들은 영업용이냐 범죄용이냐를 불문하고 팔아치운다. 중국 등에 서버를 두고 국내에서 대놓고 장사를 하는 브로커도 많다.

온라인 포털사이트에 ‘DB(데이터베이스) 팝니다’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누구나 브로커가 올린 글을 통해 이들과 접촉할 수 있다. 불법 유통이 그만큼 일반화돼 있다는 얘기다.

◆“모르는 문자 안 연다”…‘연락기피족’ 늘어

삼성화재는 얼마 전 폭설이 내릴 때 보험고객들에게 안전운전을 권하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다 달라진 사람들의 인식을 확인했다. 이럴 경우 안내용으로 써온 ‘1588’ 전화번호가 마침 카드 정보 유출 관련 문의로 마비될 지경이었던 탓에 일반 전화번호로 메시지를 보낸 게 화근이 됐다. 문자를 보낸 뒤 보험 고객들의 반응을 체크해 보니 태반이 스미싱 사기 문자인 줄 알고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모르는 전화는 아예 받지 않는 사람도 많아졌다. 마케팅 전화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개인정보를 이용한 사기 사건이 연일 지면을 장식하면서 의심도 커졌다. 최근에는 검찰 직원이라며 정보 유출 사고에 연루됐으니 수사를 위해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수법도 등장했다. 피해자는 계좌 비밀번호와 보안카드 번호를 알려줬다가 통장에서 5000만원이 빠져나갔다. 굳이 보도를 보지 않더라도 주변에 실제 피해를 당한 사람도 많다.

정보보안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대책을 내놨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내용도 많이 들어 있다”며 “1994년 성수대교 붕괴를 계기로 여러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안전 점검이 근본부터 이뤄졌던 것처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보 보호 및 관리 체계를 기본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서/임기훈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