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예산 갖고 장난하지 마라
우리는 내년 초 사상 처음으로 준(準)예산이 편성되는 사태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때 이른 걱정일 수 있지만 기우(杞憂)는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와 상임위가 새해 예산안 심의에 들어가기는 했다. 그러나 한참 늦었는데도 파열음은 여전하다. 민주당은 정부안의 대폭 수정이 없으면 예산안 처리에 협조할 수 없다고 버틴다.

2014년 예산안을 겨우 나흘 남은 법정시한 안에 처리하는 것은 진작에 글렀다. 헌법은 국회가 새 회계연도 시작 30일 전(12월2일)까지 정부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가 이를 지킨 것은 가뭄에 콩나듯 했을 뿐이다. 직선 대통령 정부인 1988년 6공화국 이후 25년간 단 6차례에 그쳤고 19차례는 시한을 넘겼다. 2003년부터는 10년 연속 법을 어긴 직무유기로 일관했다. 비정상의 관행이 정상이 되고, 법을 만드는 국회·국회의원들 스스로 헌법까지 무시한 위헌적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막판에 가서는 국회가 해를 넘기지 않고 예산안을 처리함으로써 국정의 심각한 차질을 막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 기대마저 힘들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등을 둘러싼 여당과 야당의 강경 대치가 해소될 기미는 별로 없다. 정치현안을 예산안 심의와 분리한다 해도 민주당의 ‘부자감세’ 철회와 ‘박근혜표 예산’ 삭감 입장은 완고하다. 새누리당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제대로 된 예산안 심의는커녕 연내 의결을 낙관할 수 없다.

준예산은 새로운 연도가 시작될 때까지 국회에서 예산안을 의결하지 못할 경우 전년 예산에 준해 국가운영에 필수적인 지출을 계속할 수 있게 한 제도다. 헌법·법률에 따라 설치된 기관의 유지 및 운영, 이미 예산이 승인된 사업, 법률상 지출의무 등이 대상이다. 연초부터 재정이 투입돼야 하는 일자리, 사회복지시설·영세민·보육비·기초연금 지원 등은 일시 중단된다. 정부는 준예산 편성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거듭 경고하고 있지만 여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니 어떤 재앙적 상황이 닥쳐올지 어림하기 어렵다. 정부도 준예산 집행의 구체적 규정이나 사례가 없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런 사태에도 국회의원들 세비가 지급되지 않는 일은 없고, 당장 눈물을 흘려야 하는 쪽은 서민과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점이다. 겨우 회복의 싹이 트고 있는 경기에 다시 찬물을 끼얹게 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산안 심의는 국민들로부터 걷은 세금으로 나라살림의 어디에 어떻게 쓸지를 정하는 일이다. 정부가 내놓은 내년 살림 규모는 357조7000억원이고 국민들이 내야 할 세금(국세와 지방세)은 276조4000억원이다. 한국 5000만 인구 한 사람당 550만원꼴이다. 국민들의 조세부담률을 연간 일수로 나누는 ‘세금해방일’ 계산법을 적용하면 대략 우리 국민 모두가 내년 1월부터 3월 말까지 꼬박 일해 번 돈을 고스란히 정부에 갖다 바쳐야 한다. 그 피 같은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꼼꼼히 따져야 하는 것이 국회의 최우선적인 책무다. 9월 열리는 100일 회기의 정기국회를 예산국회라고 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1년이나 흐른 지난 대선에 대한 야당의 불복(不服)프레임에 갇힌 정쟁으로 3개월을 허송세월하다 이제사 지난해 결산을 뚝딱 처리하고 새해 예산안에는 손도 못대고 있다.

이제 아무리 속도를 낸들 졸속의 부실 심의를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준예산 사태가 오지 않을 것을 믿는다. 민생과는 무관한 별것 아닌 일로 사생결단할 것처럼 싸우면서 국민들의 부아를 있는 대로 돋웠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웃으며 손잡고 세비 올리고 외유 떠나는 우리 여당과 야당 의원님들이 그 능란한 정치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하면 될 일이다. 아무리 늦어도 올해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제야(除夜)의 종소리가 들리기 전에….

추창근 기획심의실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