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후 5년…한국기업 체력 바닥
‘위기일수록 빛나던 한국 기업의 저력, 어디로 갔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국내 기업의 체력이 급속히 소진된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 성장률이 급락하고 영업이익률은 일본에 역전당하는 등 이상 징후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각 5년간 기업성적표를 비교한 결과다. 경고음이 계속 울렸지만 한국 경제의 ‘위기불감증’은 이를 그냥 지나쳤다.

◆위기 3년도 안 돼 ‘녹다운’

삼성경제연구소는 16일 ‘위기 후 5년 한국 기업경영의 현주소’란 보고서에서 “국내 기업의 경영실적이 2011년부터 계속 악화했다”며 “과거 외환위기 후 5년간 견조한 실적을 보이며 위기를 극복했던 것과 대조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한국 기업은 그동안 위기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5년차였던 2002년, 기업 수익성을 나타내는 매출액영업이익률은 7.2%(비교 가능한 734개 상장 기업 기준)로 1997년(6.3%) 수준을 웃돌았다. 김성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외환위기 충격은 매우 컸지만 회복 속도는 빨랐다”며 “정부와 기업 모두 고강도 대응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기 이후는 달랐다. 2010년 매출액영업이익률은 7.4%로 위기 직전인 2007년 7.1% 수준을 회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2년 연속 내리막을 타더니 지난해엔 위기 한가운데 있던 2008년(5.6%)보다 못한 5.2%에 머물렀다.

◆미국 일본 앞서가는데

물론 금융불안을 겪고 있는 인도 등 다른 신흥국보다는 낫다. 정부는 국내 기업의 강한 체력을 강조하고 있고, 외국인도 이날까지 34일 연속 국내 주식을 순매수했다. 불안한 것은 경쟁 관계인 미국 일본 기업들과 달리 국내 기업의 후퇴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다. 김 연구원은 “국내 기업은 외환위기 경험과 수익 중심 경영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였다가 금방 체력이 소진된 것 같다”며 “지난해 영업이익률(5.2%)이 일본 기업(5.8%)에 역전된 건 위험 신호”라고 설명했다.

이런 후퇴는 한동안 지속된 ‘환율 효과’가 사라진 탓도 있다. 2008년 1월 이후 1년 만에 원·달러 환율은 45% 급등(원화가치 절하)했다. 해외에서 올린 실적을 원화로 환산하면 실적이 그만큼 부풀려진 것이다. 이런 환율 효과를 제거하면 2009년 한국 기업은 4% 마이너스 성장한 셈이 된다.

세계 경제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음에 따라 수출 기업의 실적 회복세가 특히 더디다. 지난해 전기전자 기업(524개 상장사)의 매출증가율은 11.3%였지만 삼성전자 등 3개사를 제외하면 오히려 감소했다.

◆경영 자세가 달라졌다

기업들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다. 경영환경이 불확실해지자 기업들은 급격한 변화보다 충격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신규 사업 진출을 검토 중인 기업 비중은 2007년 6.6%에서 2011년 4.0%로 떨어졌고, 올해 상반기 해외 직접투자는 전년 동기보다 23% 급감했다. 위기 이후 5년이 지났지만 기업들이 미래를 위한 투자는 꺼리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몸을 사리는 데는 사회 분위기도 크게 작용했다. 금융위기 이후 사외이사 비중이 늘어나는 등 기업 감시가 강화됐다. 펀드·연금의 경영 참여도 활발해졌다. 이는 의사결정시스템을 투명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위기 극복의 원동력이 될 투자활동엔 걸림돌이 됐다. 유병규 국민경제자문회의 지원단장은 “외환위기 때와 달리 기업의 심리 자체가 위축돼 있다”며 “시장에서 우려하는 경제민주화에 대해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