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현대자동차그룹의 대졸 신입사원 공채 시험에선 응시생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나왔다. 30분 동안 1000자 이내로 역사 에세이를 쓰라는 것. ‘고려, 조선시대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그의 업적을 설명하고 이유를 쓰시오’와 ‘세계의 역사적 사건 중 가장 아쉬웠던 결정과 자신이라면 어떻게 바꿀지 기술하라’는 주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국내 대기업 가운데 인·적성검사에 논술시험을 도입한 건 현대차그룹이 처음이다.

현대차그룹이 채용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있다. 올 하반기 새로운 형태의 인·적성검사를 도입한 데 이어 학점, 토익(TOEIC) 성적과 무관하게 열정과 인성만 보고 뽑는 독특한 채용방식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내년에는 더욱 파격적인 채용시스템도 선보일 예정이다. 글로벌 기업에 걸맞은 인재 선발방식을 갖추려는 목적과 함께 삼성 등 경쟁기업에 우수 인재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에세이시험 첫 도입…현대차의 '채용 개혁'

○확 바뀌는 현대차 채용시스템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9일 “올해 일부 채용시스템을 바꾼 데 이어 내년부터 창의성과 책임감에 중점을 둔 신개념 채용방식을 계속 도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 채용 방식은 애사심이 투철한 지원자가 아닌 현대차 안티팬(비방하는 사람)을 뽑는 식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예를 들어 현대차 품질에 문제를 제기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라도 끈기와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뽑겠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남다른 열정과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를 뽑기 위한 시도”라며 “앞으로 대졸 공채를 통한 채용 인원을 줄이고 인턴이나 콘테스트 등을 통한 채용 비중을 늘릴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는 이미 올해 채용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를 위해 외부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 기존 채용 방식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인사 전문가를 영입했다. 그 결과물이 기존 인·적성검사인 HKAT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HMAT다. 올 하반기 공채 때 처음 도입한 HMAT는 경쟁사의 인·적성검사를 비교 분석하고 외부 전문가의 감수를 거쳐 1년 동안 만들었다. 대리급 직원 2000명을 대상으로 모의 테스트까지 거쳤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HMAT의 특징은 시험시간을 5시간으로 기존보다 두 배 이상 늘리고 인문학적 소양을 평가하기 위해 역사 에세이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역사 에세이 답안을 검토하는 데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할 정도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다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창의적 인재를 가려내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시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에 인재 뺏길 수 없다


현대차그룹이 이처럼 채용시스템을 개편하는 까닭은 커진 ‘몸집’에 걸맞은 인재 유치 및 인력 관리를 위해서다. 현대차그룹의 전체 임직원 수는 15만명, 연간 신규 채용인원은 1만명에 달한다. 한성권 현대차 인사실장(부사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규모가 커진 만큼 효율적인 채용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회사와 궁합이 잘 맞는 사람을 선발하면 인력채용과 입사 후 재교육에 드는 고정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평범한 채용 방식으로는 삼성 등의 경쟁사들에 우수 인재를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 삼성은 1995년부터 공채 필기시험을 없애고 일찌감치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를 도입한 반면 현대차그룹은 2008년에야 현대·기아차 등 일부 계열사에서 인·적성검사를 시작했다.

또 삼성은 모든 지원자에게 SSAT를 볼 기회를 주지만, 현대차그룹은 서류전형을 통과한 1만여명에게만 공채시험에 응할 자격을 준다. 그룹 차원의 인재선발 시스템이 없는 데다 폐쇄적으로 운영해왔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현대차그룹 경영진도 올해 초 인·적성검사와 관련해 “그룹 전체에 도입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시험을 개발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대학생들과의 스킨십을 부쩍 강화하고 있는 이유도 삼성 등에 비해 위계 질서가 엄격한 조직이란 외부 인식을 없애기 위해서다. 대신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기업 이미지를 심기 위한 마케팅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 새로 도입한 ‘길거리 캐스팅’ 방식의 대학생 채용 시스템도 이런 고민 끝에 나왔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