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로 헬터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 회장은 기자에게 명함 두 장을 차례로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쪽이 제게 월급을 주고 다른 쪽은 제 시간을 빼앗아 간답니다”. 첫 번째 명함에는 만트럭버스코리아 사장, 다른 것에는 ECCK 회장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비상근직이긴 해도 ECCK 회장의 업무가 적지 않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허문찬기자 swe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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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틸로 헬터 회장의 일정은 유럽 기업 경영진과 통상무역 관계자, 한국 정부 인사들과의 약속으로 빼곡하게 차 있다. 화학물질 등록·평가법(이하 화평법), 외국인 근로자 소득세 감면 혜택 축소, 통상임금 소송 등 한국 정부 관계자와 논의해야 할 안건도 다양하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기업 규제가 강화되면서 한국에 있는 외국 기업인들도 적잖게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 헬터 회장의 업무가 늘어난 것과 무관치 않다. 그는 “ECCK 회장으로 부임한 10개월 동안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느낀 바가 많다”며 거침없이 얘기보따리를 풀어놨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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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터 회장이 단골집으로 소개한 곳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톰볼라 삼성점. 2003년 서래마을에서 문을 열어 화덕 피자로 유명해진 톰볼라의 삼성동 분점이다. 벽돌집 안으로 들어서자 장작이 타는 화덕과 15개 남짓한 테이블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레스토랑 매니저가 헬터 회장을 가리키며 “어제 저녁에도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인터뷰하기 편한 자리를 살펴보고 가신 분”이라고 귀띔했다.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화려하지 않은 실내처럼 메뉴도 익숙한 음식들로 구성돼 있었다. 샐러드 파스타 피자 등 일반적인 이탈리안 가정식 위주다. 헬터 회장은 주요리로 매콤한 토마토소스와 수제 소시지의 펜네 파스타인 ‘펜네 콘 살시챠’를 주문하고 음식 이야기부터 꺼냈다. “매운 음식을 잘 먹습니다. 김치 된장찌개 해장국도 좋아하죠. 고향인 독일 음식보다 한국 음식을 더 자주 먹을 정도예요.”

산낙지를 먹었던 일화도 들려줬다. “한번은 부산에서 근무하는 딜러를 만나러 갔는데 가장 비싼 음식을 사주겠다며 횟집에 데려가더군요. 한국에서 생선은 요리한 것이 저렴하고 날것일수록 비싸다고 하더라고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접시에서 꾸물대는 산낙지를 미끄러운 쇠젓가락으로 겨우 집어 입속에 넣었는데 살아서 꿈틀거리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산낙지를 좋아하는 줄 알고 부산에 갈 때마다 직원들이 그 식당에 데려갈 때면 당황스럽습니다. 하하.”

그는 도전을 즐긴다. 언어도 그중 하나다. 모국어인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다. 2011년 7월 만트럭버스코리아 사장으로 부임한 후 1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한국어를 배웠다. ‘언어는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금은 웬만큼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언어를 이해하게 되면 그 나라의 사람, 곧 고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는 처음엔 어렵지만 한번 논리적 구조와 문자의 구성을 이해하면 쉽게 배울 수 있어요. 과학적이고 지능적인 언어죠. 그런 점에서 한국 고객들은 똑똑하고 까다로워요. 쉽게 공략하기 어렵지만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면 한국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죠.”

○모든 일의 기본은 듣는 것이다


전채요리로 신선한 토마토와 물소젖 치즈의 카프레제 샐러드가 나왔다. 촉촉하고 담백한 치즈와 새콤한 토마토, 알싸한 루콜라가 어우러져 입맛을 돋웠다. 헬터 회장은 지갑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꺼내 보여줬다. 들을 ‘청(聽)’자가 적혀 있었다. “이 한자를 잘 살펴보세요. 왼쪽에 듣기 위한 귀 이(耳)자가 있죠? 오른쪽에는 눈 목(目)자가 가로로 누워있고요. 상대방에 대한 관심, 마음 심(心)자도 있어요. 해석하면 마음을 다해 상대를 보고 귀를 기울여야 들린다는 얘기죠. 이 단어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사 사무실 곳곳에 이 글자를 써붙였다. 주변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이 종이를 보여준다. “만트럭버스코리아에 부임하자마자 매주 전국을 돌며 모든 딜러와 영업사원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고객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또 한국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는 제 약점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었으니까요. 저는 직원들에게 트럭 한 대를 파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객이 우리 트럭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무슨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고 항상 강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소비자들에게 듣는 것이 기본이 돼야 하죠.”

그는 트럭을 구입하는 일용직 운전사들이 초기 부담 비용과 차량 유지비에 민감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고가의 수입 트럭을 저금리 할부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하고 국내 수입 상용차 중 최초로 3년, 45만㎞ 소모품 무상보증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기름값이 오르자 연비가 좋은 디젤 트랙터도 들여왔다. 그 결과 만트럭버스코리아 판매 대수는 2010년 200대에서 지난해 두 배로 급증했다. 올해는 600대를 돌파할 전망이다. 그는 “고객의 불만을 진지하게 듣고 이를 데이터로 축적해 서비스 질을 높인 덕분”이라고 했다.

○믿는 것이 곧 현실이 된다

메인 요리인 산다니엘레 피자와 꽃게 스파게티가 나왔다. 피자는 화덕에 바삭하게 구워낸 ‘도우(빵)’에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모차렐라 치즈와 프로슈토를 올렸다. 심심한 모양새와 달리 짭짤한 프로슈토와 고소한 치즈의 맛이 일품이다. 빨간 꽃게 등 껍데기를 그대로 얹어나오는 스파게티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게살의 감칠맛이 면에 배어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간이 알맞았다.

자극적이지 않고 끝맛이 담백해 매일 먹어도 부담없을 것 같았다. 저녁 자리가 무르익자 헬터 회장은 최근 주한 유럽기업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서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올해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시시때때로 바뀌는 기업 규제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며 “외국계 회사들이 한국과 믿을 수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관계를 유지하려면 일관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은 곧 현실이 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 정부가 외국 기업을 차별한다는 불만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얘기들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을 조심해(be careful Korea)’라는 위험 신호를 주게 됩니다. 한국에 대한 모든 뉴스를 챙겨볼 수는 없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부정적 뉴스는 유독 눈에 띄게 돼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 투자 성향이 감지됐을 때 정부가 서둘러 방향을 수정해야 합니다.”

헬터 회장은 올해 들어 세수 확보 차원에서 기업에 강도 높은 세무 조사를 실시하고 통관 절차를 강화한 것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그는 “한국에 진출하지 않은 외국 글로벌 본사에서 한국은 기업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외국인 소득세 인상과 관련해서도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정부가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 일률적으로 17%의 소득세를 부과하는 ‘외국인 근로자 소득세 감면 혜택’을 올해 1월1일부터 2년간 시행하기로 했다가 8개월 만에 혜택을 축소하면서 유럽, 일본 기업인들이 반발하고 있다. 헬터 회장은 “규제는 시점(타이밍)의 문제”라며 “소득세 인상과 관련해 기획재정부에 외국 기업의 의견을 전달했으며 ECCK가 양측을 중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정부기관과 의견을 교환하고 오해를 풀 수 있는 자리가 자주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면 오해가 생기고 잘못된 결과를 낳으니까요. 작은 음표들이 모여 음악을 만듭니다. 부정적인 요소들이 모여 외국기업 전체의 투자기피 현상이라는 큰 트렌드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결론은 또 듣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소통입니다.”

헬터 회장은 이런 생각을 ‘H=R-E’라는 수학 공식으로도 설명했다. happyness(행복)=reality(현실)-expectation(기대)이라는 뜻이다. “행복은 현실에서 기대치를 뺀 것입니다. 기대치가 높아지면 행복이 줄어들죠. 한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기업이 행복해지려면 투자자들에게 지키지 못할 헛된 공약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투자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올바르게 현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앞서 얘기했듯 인식은 곧 현실입니다. 소통의 부재로 잘못된 인식이 확산되면 그것이 곧 현실이 되죠. 한국은 이 무서운 진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틸로 헬터 유럽상공회의소 회장, "기업하기 힘든 한국…오해도 놔두면 진실이 되는 법"
틸로 헬터 회장의 단골집 서울 삼성동 '라톰볼라'
화덕피자·꽃게 스파게티 … 입안 가득한 ‘로마의 맛’

[한경과 맛있는 만남] 틸로 헬터 유럽상공회의소 회장, "기업하기 힘든 한국…오해도 놔두면 진실이 되는 법"
서울 삼성동 코엑스 건너편 한국전력 옆 블록에 위치한 라톰볼라는 화덕 피자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단순한 조리과정으로 식자재 원래의 깊은 맛을 살려내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로마지역 스타일의 음식을 주로 선보인다. 메뉴는 샐러드 10종류, 파스타와 피자 각각 13종류로 다양하며 가격은 2만원 안팎이다.

신선한 토마토와 물소젖 치즈의 카프레제 샐러드는 2만원, 토마토소스 모차렐라 치즈에 프로슈토를 올린 산다니엘레 피자는 2만2000원, 매콤한 토마토소스와 수제 소시지의 펜네 파스타인 펜네 콘 살시챠 2만원, 마늘과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건강식 꽃게 스파게티 1만8500원. (02)568-6550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