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 회장의 횡령혐의 사건에서 핵심 인물로 지목돼온 김원홍 전 SK 고문이 대만에서 체포됐다. 수백억원 횡령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은 최 회장은 최근 항소심 공판에서 “김 전 고문에게 홀려 사기당했다”고 진술한 바 있어 향후 판결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법무부와 검찰은 1일 “대만 경찰이 어제 이민법 위반으로 김씨를 체포했다. 대만 당국과 협의해 소환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최 회장은 2008년 10월께 SK그룹 계열사 두 곳이 베넥스인베스트먼트 펀드에 출자한 450억원의 선지급금을 선물·옵션 투자 명목으로 빼돌린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항소심 법정에서 김씨를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김씨 요구로 펀드 조성에 관여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출자금이 김씨에게 송금된 사실은 몰랐다는 주장이다. 최 회장은 법정에서 “450억원이 김씨에게 간 사실은 2011년 3월 베이징에서 처음 알았다”며 자신의 횡령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이날 “최 회장 측이 최근 김씨를 상대로 고소장을 냈다”고 확인했다. 펀드 조성도 김씨가 주도했다는 것이 최 회장의 주장이다. 최 회장은 “그룹 차원에서 펀드를 생각했는데, 김원홍이 김준홍에게 맡기자고 해서 SK 계열사에 펀드 출자를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씨는 SK해운에서 고문을 지냈지만 SK 내에서도 ‘주술인’ 등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다만 최 회장 형제에게는 영향력이 막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준홍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는 “단순한 투자 에이전트가 아니며, 최재원 SK 부회장은 거의 복종할 정도”라고 했다. 항소심 재판장인 문용선 서울고법 형사4부 부장판사도 지난달 11일 공판에서 “뒤에 숨어서 이 사건을 기획·연출한 사람은 김원홍 같다. 그의 됨됨이가 어떤가는 사건을 심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김씨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최 회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미지수다. 최 회장 측이 지난 6월 공개한 녹취파일에서 김씨는 최재원 부회장에게 “너희 형제는 잘못이 없다”며 최 회장을 옹호하는 발언을 주로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녹음파일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 김씨의 신병이 먼저 검찰로 넘겨질 경우 수사과정에서 김씨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변수다.

지난달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최 회장에게 징역 6년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오는 9일로 선고 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김씨가 사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선고 연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SK 측도 “재판부에 변론 재개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고법 공보판사는 “향후 재판일정 변경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고 전했다.

김병일/배석준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