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社1병영] 이강태 비씨카드 사장, 뱃멀미 하루만에 극복한 오기…軍이 준 삶의 자산
나는 1976년 1월21일, 해군사관후보생 65차로 입대했다. 추운 겨울 난생 처음 가 본 진해가 어찌 그리 어설펐던지….

하루 종일 얘기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군대 얘기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를 말하려 한다. 첫 번째는 ‘깍두기 사건’이다. 해군 훈련에는 ‘지옥주(hell’s week)’라는 게 있다. 배가 난파돼 조난 당했을 때를 대비해 1주일 동안 진행하는 극한의 생존 훈련이다. 지옥주를 거치고 나면 동기생들의 눈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느껴질 정도다. 1주일 동안 밤마다 취침 1시간, 훈련 1시간을 번갈아 가면서 한다. 식사도 30초 안에 마쳐야 한다. 그것도 상방 15도를 쳐다보며 하는 직각 식사다. 한마디로 잠 못 자고 배고픈 상황을 이겨내는 훈련이다.

저녁 식사에 동탯국이 나왔다. 국에 밥을 말아서 후다닥 숟가락을 딱 뜨는 순간 아뿔싸 동태 머리가 올라오는 게 아닌가. 재빨리 내려놓고 다시 떴는데, 이번에는 동태 가시가 한 무더기 올라온다. 배는 고픈데 두세 숟가락 뜨고 나니 식사 끝. 급한 마음에 주린 배는 채워야지 싶어 나중에 먹을 요량으로 큼지막한 깍두기를 손으로 집었다. 그때 뒤에서 “식사 끝 이후에 움직인 사후생 앞으로”라는 구대장 목소리가 들렸다. 아차 들켰구나 싶어 앞으로 나갔다.
1978년 4월 경남 진해 해군 통제부 근무 시절의 이강태 소위. 
1978년 4월 경남 진해 해군 통제부 근무 시절의 이강태 소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또다시 울려 퍼지는 “양심불량인 사후생 앞으로!” 말이 끝나자마자 5명이 나왔다. 내가 걸린 게 아니었다. 구대장이 프로골퍼 김혜윤의 드라이버 타법으로 이대호의 힘을 실어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내리쳤다. 나는 2대, 뒤에 나온 사후생은 늦은 죄로 2배수, 꼴찌는 10대를 맞았다. 지금도 설렁탕 집의 큼지막한 깍두기를 보면 ‘내가 배가 고파서 저걸 먹겠다고 맨손으로 움켜 쥐었었지’하며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두 번째는 뱃멀미 극복기다. 대전함 경리관으로 발령받던 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바로 출항을 나갔다. 1시간쯤 지났을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구축함이 일엽편주가 돼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난생 처음 겪어보는 뱃멀미가 시작됐다. 사관 후보생 시절 웬만한 훈련은 자신 있었는데 속 뒤집히는 것은 대책이 없었다. 차마 선배 장교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내 방으로 냅다 뛰었다. 뚜껑도 없는 변기에 머리를 처박았는데, 변기 물에 내 얼굴이 비치는 게 아닌가.

그때 갑자기 ‘이강태! 너 지금 변기에 머리 박고 뭐 하는 짓이냐? 너 이 정도밖에 안돼?’ 하는 내면의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그 순간 강한 오기가 생겼다. ‘토하면 지는 거다. 참자!’ 꾹 참고 나와 침대에 누워 밤새 시달렸다. 그렇게 첫날을 넘겼다. 그날 이후 함상 생활 14개월 동안 멀미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바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내가 뱃멀미를 하루 만에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다 강한 훈련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쓰는 일부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군대 가서 썩는다고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참 많이 배우고 단단하게 성장한다. 사회생활에서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군대에서 배운 인내심과 충성심, 실행력과 리더십, 그리고 팀워크가 큰 힘이 된다. 물론 훈련받을 때는 무지 힘들다. 철없는 대졸자들 불러다가 해군·해병 장교 만드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하지만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치고 힘들지 않은 게 어디 있는가. 자신 있게 군대 가자. 이왕 가려거든 해군 장교로 가자.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한다. 군생활을 통해 힘든 것을 스스로 이겨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삶의 자산이 생긴다.

1979년 7월31일 제대하는 날, 오후 4시까지 근무했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LG그룹으로 출근했다. 꼬박 40개월 군대생활을 했고 그 힘으로 40년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군은 내 마음 창고에 38년이나 장기 보관돼 어찌 보면 이제 시효를 넘어선 음식이다. 하지만 더 잘 숙성돼 앞으로도 내 인생의 효소가 될 것이란 기대는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