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원리 활용…3차원 공간을 평면 위에 구현하는 마법
수학원리 활용…3차원 공간을 평면 위에 구현하는 마법
강희제 시절 청나라 궁정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당시 청 궁정에는 황제를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기 위해 예수회 교단에서 파견된 벽안의 선교사들이 궁정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번은 황제의 명에 따라 그들이 직접 그린 유화를 시연해 보이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양화를 처음 목격한 대신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적 입체 공간이 사실적으로 재현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게 정말 평면 위에 그려진 것인가 미심쩍어 너 나 할 것 없이 손가락으로 그림을 만져봤다. 그린 지 얼마 안된 유화 표면은 뭉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평면 위에 3차원적 입체 공간을 재현한 기법에 대한 시각적 충격을 말해준다.

서양에서 체계적인 3차원적 재현 기술이 처음 완성된 것은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피렌체에서였다. 묘사 대상 인물을 명암법으로 아무리 완벽하게 묘사한다 해도 3차원적 입체 공간 속에 배치하지 못한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세의 그림들이 평면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입체감은 물론이고 원근감이 결여된 탓이다. 여기서 원근법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 마술 같은 원리를 처음으로 정립한 사람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거대한 돔을 설계한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그는 우리 주변의 대상은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일정한 비율로 축소돼 비치며 수평선과 만나는 한 지점(소실점)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에 착안, 선(線) 원근법을 정립했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2차원적 평면 위에 3차원적 입체 공간을 재현하는 방법을 체계화했다.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에 따라 최초로 평면 위에 3차원적 공간을 재현한 사람은 피렌체의 천재화가 마사초(1401~1428)였다. 그는 오로지 그림밖에 모른 외골수로 몸도 제대로 씻지 않아 ‘더러운 톰’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은 위인이었다. 그가 1427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벽에 그린 ‘성 삼위일체’는 서양미술사상 처음으로 원근법이라는 마술을 완벽하게 구현한 사례로 기록됐다.

이 그림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 신도가 교회 측에 시주한 것으로 마사초는 주문에 따라 이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성부(하느님), 성자(예수), 성신(성령)은 하나’라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키가 162㎝인 사람이 마치 실제 건축 구조물에 자리한 존재를 본 것처럼 묘사했다.

이 그림이 얼마나 정확히 원근법의 원리를 따라 그렸는지는 마사초가 직접 도해한 다이어그램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4단계로 조금씩 거리를 두고 배열돼 있다. 맨 앞의 아치형 구조물 바깥쪽에는 좌우에 그림을 교회에 헌납한 두 신도가 기도하는 자세로 서 있고 그 뒤 건축물 안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요한이 자리하고 있다. 또 그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고 다시 그 뒤에는 하느님이 있다. 하느님과 예수 사이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졌다. 마사초가 도해한 측면 다이어그램은 그림 속에 구현된 건축적 공간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수학적으로 정확히 측정돼 있다.

그러나 원근법은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근법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훨씬 자유롭다.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대상을 바라볼 때는 그 주변의 것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 어떤 것은 크게 보이고 어떤 것은 더 작게 인식되기도 한다. 선 원근법은 세상을 수학적으로 바라보자며 화가와 감상자가 맺은 하나의 약속에 불과하다. 이렇게 과학에 근거했지만 인간의 인식체계는 여전히 한계가 뚜렷하다.

그림의 시주자 아래 그려진 석관의 해골 위에 쓰인 메시지는 그 점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나는 한때 너였느니라. 그리고 너는 지금의 나와 같게 되리라.” 인간의 삶과 정신은 한시적일 뿐이니 신의 품안에 안겨 영생을 얻으라는 얘기다. 마치 한시적인 인간의 지식으로 영원한 신의 세계를 재현하려하는 인간의 무모함을 꾸짖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