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수동에 있는 삼성문화인쇄는 고급 인쇄 전문업체다. 미술품 도록이나 고급 외제 승용차 브로슈어, 외국항공사 캘린더 등을 제작한다.

이 회사는 불황이 닥친 요즘도 첨단 설비 도입에 여념이 없다. 인쇄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가운데 이 회사가 거꾸로 설비 투자에 나서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병욱 삼성문화인쇄 사장(왼쪽)이 책을 만드는 설비 앞에서 직원과 품질 관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낙훈 기자
조병욱 삼성문화인쇄 사장(왼쪽)이 책을 만드는 설비 앞에서 직원과 품질 관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낙훈 기자
1990년대 중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서른살 남짓한 한국 젊은이가 비행기에서 내렸다. 러시아의 중년 기업인이 이 젊은이를 깎듯이 모셨다. 자동차로 30분쯤 갔을까. 아름다운 골든혼베이도 보였다. 해가 질 때 바닷가가 황금색으로 변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동차는 커다란 인쇄공장 앞에서 멈췄다. 러시아 기업인은 인쇄공장에 설치돼 있는 설비들이 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지 이 젊은이에게 해결해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당시는 러시아의 ‘개혁’과 ‘개방’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민영기업들의 태동기여서 기업인들이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시절이었다.

공장 안을 둘러보니 옛 동독제 인쇄기계들이 가득 있었다. 이들 설비는 중앙정부에서 물물교환 방식으로 들여와 나눠준 것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전체 설비가 정교하게 설치돼 있지 않았다. 직원들은 이 설비의 유지 보수 방법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깔끔하게 인쇄가 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 젊은이는 기술자 한 명과 함께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기계를 다시 설치하고 작동 방법을 가르쳤다. 시험 결과 훨씬 깨끗한 인쇄물이 쏟아져 나왔고 환호성이 터졌다.

이 젊은이가 조병욱 삼성문화인쇄 사장(48)이다. 1956년 설립된 삼성문화인쇄는 책 카탈로그 캘린더 화보집 등을 만드는 업체다. 본사는 서울 성수동에 있고 종업원 약 60명이다. 조 사장은 인쇄를 하는 기업인이지 설비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도 외국 설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것은 밑바닥부터 인쇄 공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회사 창업자인 조영승 회장(80)의 아들인 조 사장은 보조 공원으로 인쇄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강대 영문과를 나와 삼성전자와 코오롱상사를 거친 그는 27세이던 1992년 삼성문화인쇄에 입사했다. 그가 처음 맡은 업무는 종이를 차곡차곡 쌓는 일이었다. 커다란 종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겁기도 했지만 한쪽으로 기울어져 쓰러지기 일쑤였다. 하루종일 종이를 나르다 보면 등이 뻐근하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그 다음은 인쇄기에 붙어 있는 기름 때를 벗기는 일이었다. 조 사장은 “인쇄기에 붙어 있는 종이가루와 잉크덩어리 범벅을 닦아내고 나면 하늘에서 별이 보였다”고 말했다.

연말에는 한 달 이상 철야근무를 했다. 조 사장은 “공장 소파에서 틈틈이 눈을 붙이며 일했다”고 회고했다. ‘사장 아들이 대학 나와 번듯한 대기업을 다니다가 기껏 이런 일을 하다니….’ 웬만한 2세라면 이런 푸념 끝에 당장 때려치우고 도망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런 혹독한 훈련을 거쳐 세계적인 인쇄기업체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인쇄에서 연수를 받았다. 영업과 자금관리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해 해외시장 개척에도 나섰다. 아울러 세계 각지의 인쇄전시회를 참관했다.

한번은 영국의 무역업체가 봉투를 만드는 중고 설비를 수리해 보내왔는데 당초 얘기한 내용과 다른 설비였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며칠간 수소문한 끝에 맨체스터 부근의 리즈에서 그 수출업자를 찾아내 대금지급 각서를 받아냈고 현지 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건 끝에 몇 달 뒤 돈을 회수했다. 지금 가치로 2억원이 넘는 금액이다.

이런 현장경험이 몸에 배자 러시아에서 지인을 통해 설비 자문을 요청해왔다. 이 인연으로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서 고급 인쇄물 주문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여기에는 현지 시정부나 주정부가 해외관광객을 대상으로 홍보하기 위해 만든 고급 사진화보집도 들어있다.

일본에서는 권당 20만원이 넘는 고급 인쇄물인 디자인집과 사진화보집 등을 수주했다. 미국에서는 보석 액세서리 등의 카탈로그를 주문받았다. 몽골에서는 관광안내사진집 등을 수주해 납품했다.

고급 인쇄물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요소가 맞아떨어진 데 따른 것이다. 첫째, 첨단 설비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부친의 성품을 본받아 근검절약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접대비를 한푼도 쓰지 않는다. 자가용은 10년이 넘은 수동변속기 차량이다. 하지만 첨단 설비에는 과감하게 투자한다. 작년에는 스위스 뮬러마티니에서 두꺼운 표지를 입힐 수 있는 ‘하드커버 양장제책기’를 들여왔고 최근에는 ‘풀칠·엮음설비’도 도입하기로 했다.

조 사장은 “풀칠·엮음설비는 뮬러마티니가 지난해 처음 선보인 첨단기종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 3개국 기업 가운데 우리가 가장 먼저 도입하는 설비”라고 말했다. 조 사장은 “지금 쓰고 있는 일본 설비도 우수하지만 생산성을 더 높이기 위해 이 설비를 들여오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설비는 8월 말 설치될 예정이다.

뮬러마티니는 인쇄 후(後)공정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봉으로 꼽히는 업체다. 장비 가격도 독일이나 일본에 비해 훨씬 비싸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발달로 인쇄 물량이 줄면서 인쇄업체들의 휴·폐업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이런 투자가 이뤄진 것이다. 이들 기계설비를 포함해 최근 2년간 투자액이 40억원에 육박한다. 중소업체로선 적지 않은 금액이다.

둘째, 원스톱 서비스체제 구축이다. 조 사장은 “일본 미국 등지로 수출하려면 최고급 인쇄품질과 더불어 빠른 납품이 중요하다”며 “인쇄 분야에서 원스톱서비스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설비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전에는 외국 기업들이 납기를 2~3주 정도 보장해줬으나 요즘은 5일 만에 납품할 수 있느냐고 물어오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이런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선 외주 가공 없이 우리 공장에서 인쇄부터 제책까지 처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셋째, 장기 근속자와 호흡을 맞추는 일이다. 조 사장은 “인쇄 품질을 높이려면 단순히 설비만 좋아선 안 된다”며 “이를 운영할 수 있는 숙련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다행히 우리는 20년 넘은 근속자가 많다”고 말했다.

조 사장은 “인쇄산업의 미래가 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종이인쇄 산업이 절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이책은 인류문화의 유산이고 인터넷으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함과 편리함도 있어 명맥은 계속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좋은 설비로 선명한 인쇄물을 찍어내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며 “앞으로도 고품질 제품 생산에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