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미군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회원들이 21일 서울 여의도동 중앙보훈회관 4층 사무실에서 전우들의 사진을 들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완기 부회장, 김병익 회장, 조승배 사무총장. 홍선표 기자
6·25 전쟁 당시 미군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회원들이 21일 서울 여의도동 중앙보훈회관 4층 사무실에서 전우들의 사진을 들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완기 부회장, 김병익 회장, 조승배 사무총장. 홍선표 기자
재일학도의용군 선발 1진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학도병들이 당시 참전 의사를 혈서로 적은 태극기를 들고 찍은 출정식 기념사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제공
재일학도의용군 선발 1진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학도병들이 당시 참전 의사를 혈서로 적은 태극기를 들고 찍은 출정식 기념사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제공
“급하게 출정식을 한다고 해서 모자도 못 쓰고 사진을 찍었어요. 절반 이상이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전쟁터로 달려갔죠.”

21일 서울 여의도동 중앙보훈회관에서 만난 조승배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사무총장은 양복 주머니에서 색 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꺼내보였다. 혈서가 쓰여진 태극기를 손에 잡은 교복 차림의 인물들은 6·25 전쟁 당시 일본 현지에서 입대해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1950년 재일동포 사회는 좌우익으로 나뉘어 반목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했다는 다급한 소식이 일본 현지로 날아들었다. 조국 수호를 위해 참전하겠다는 청년들의 문의가 주일대표부로 쏟아졌다. 조 사무총장은 “주일대표부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미 극동사령부에 문의하라’고 말해줘 미8군 편입이 결정됐다”며 “2000명 중 642명이 선발됐다”고 회고했다.

사격·제식훈련 등 2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친 재일학도의용군 1진 76명은 1950년 9월 중순 대한해협을 건너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이후 재일학도의용군은 여섯 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어왔다.

전장(戰場)에 도착한 재일학도의용군은 미군과 한국군 부대에 배치돼 인천상륙작전, 평양 입성, 압록강 해산진 전투 등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조 사무총장은 “단일 부대가 아니라 수십명 단위로 전국에 흩어져 싸우다 보니 공을 세워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재일학도의용군 중 52명은 전쟁 중 사망했고, 83명은 행방불명 상태다. 김병익 회장(82)은 “행방불명된 83명 중 대부분은 북한 지역에서 목숨을 잃었다”며 “전우들의 유골을 찾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재일학도의용군 265명은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951년 1월부터 일본으로 복귀했다. 나머지 242명은 1952년 4월 체결된 조약에 따라 주권을 되찾은 일본이 입국을 거부해 한국에 발이 묶였다. 일본 정부는 허락 없이 참전했고 일본 거주도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입국을 막았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부산 소림사에서 일본행을 모색하며 재일학도의용대(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를 만들었다.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1953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 34 탑골공원 뒤편 적산가옥에 사무실을 꾸렸다. 100여명은 이곳에 머물며 지냈다. 김 회장은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본적이 필요했다”며 “일본 태생이어서 본적이 없거나, 본적이 말소된 의용군 70여명은 종로구 인사동 34를 본적으로 등록했다”고 설명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1959년 조국의 부름을 다시 받았다. 북한의 재일동포 북송을 저지하는 데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조 사무총장 등 41명은 서울 우이동 계곡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에 들어갔으며,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15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종전 후 한동안 한국 정부는 재일학도의용군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6·25 전쟁 사망자의 유해는 한국인 주지가 운영하는 일본 도쿄 부근 사찰에 안치됐다.

정부가 이들을 예우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부터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들이야말로 1등 애국자”라고 평가했다. 1967년 처음으로 방위포상금이 지급됐고 이듬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앞서 1963년에는 일본에 안치돼 있던 전사자 53명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현재 한국에 20여명, 일본에 10명 등 모두 30여명이 생존해 있다. 조 사무총장은 “매년 7~8명의 생존자들이 삶을 마감한다”며 “모두 세상을 떠나면 조국을 위해 몸바쳤던 재일학도의용군에 대한 역사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이 가장 아쉽다”고 한숨지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