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쾌락 추구하는 존재
전체의 행복 주는 정부정책…도덕적으로 정당한 것
복지·실업구제 등 규제 지지
다수에 무한권력 부여한다는 '치명적 자만' 비판도 받아
벤담이 공리주의 철학을 만들어낸 배경엔 법관의 판결을 통해 법을 설계하는 영국의 유서 깊은 ‘코먼로’(보통법) 전통이 구태의연하고 비합리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런 법 체계를 뿌리째 개혁하지 않으면 영국 국민은 영원히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했던 변호사 개업도 포기하고 사회철학에 입문, 법철학 기초를 세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가 평생 동안 갈고닦은 연구 결과가 바로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인간이란 본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행동에 대한 선과 악을 평가할 때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행동의 결과로 산출되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벤담의 설명이다. 그는 이 논리를 사회에 적용, 사회 전체에 최대의 행복을 가져오는 정부 입법이나 정책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주목할 것은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는 벤담의 시장관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기 때문에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자동적으로 증진시킬 것으로 기대하기 힘들다고 그는 강조한다. 사회 전체의 공익을 달성하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계획과 규제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벤담은 그러나 시장경제의 ‘자생적 질서’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정부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확실하게 보호하기만 하면 저절로 질서가 유지돼 공익과 사익이 일치된다는 점을 간과한 듯하다. 합리적인 사회질서는 정부의 계획과 규제를 통해 가능하다는 간섭주의 사상이 그의 사고를 지배했다.
벤담은 시장 규제를 위한 다양한 정책 제안을 쏟아냈다. 불평등 완화, 복지 확대, 실업구제를 위한 정부지출 확대, 재화의 가격수량품질 규제, 생명보험의 국유화, 최저임금제 등이 이어졌다. 공리주의를 정부의 시장개입을 정당화한 패러다임으로 보는 이유다.
쾌락과 고통을 계산하는 공리주의에는 최대의 행복을 결정하는 정부가 정책이나 입법을 통해 생겨나는 모든 개별적인 효과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전제는 ‘치명적 자만’이라는 하이에크의 통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정부의 구조적 무지 때문에 시민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하이에크의 강력한 충고다. 인간들이 자유로우면 스스로 상호작용을 통해 필요한 제도와 가격이 자생적으로 형성되기에 시장경제라는 탁월한 ‘자생적 질서’가 생겨난다는 지적이다. 국민 행복을 명분으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자생적 힘을 파괴해 발전과 번영을 가로막을 뿐이라는 하이에크의 통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의 코먼로에 대한 벤담의 이해다. 판례에 기초한 법 체제는 주민들의 합의나 입법자를 통해 합리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에 불확실하고 불합리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발견된 법은 법이 아니고 법 제정자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든 입법이 법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게 벤담의 유명한 법 개념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문법 대신 코먼로를 도입한 사회가 자유와 재산을 더 잘 보장받는다는 지적이다. 영미법인 코먼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이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벤담의 사상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투표권이 소수에 한정돼 있던 시기에 보통선거를 지지했다. 입법자는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다. 의회는 자율권을 가지고 법을 만들고 통치를 해야 한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주장은 당시 군주와 특권 계급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벤담은 민주주의야말로 시민에게 양도된, 다수의 의지에 따른 통치이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하는 정치제도라고 강조한다.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의 쾌락이나 고통에 동일한 비중을 두기에 1인 1표의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벤담의 사상은 그러나 다수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법으로 인정하는 등 다수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소수를 착취할 수 있고 그래서 제한 없는 민주주의는 1인 독재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인식이 벤담에겐 없었다. 민주 정부를 제한할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무제한 권력을 허용한 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벤담의 교리는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는 국가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권리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로크 전통의 자연권을 부정한다. 개인의 자유도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벤담에겐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국가 이전엔 시장도 법도 없었다는 게 그의 역사 인식이다. 국가가 최고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정부 간섭에 문을 열어준 국가주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벤담은 공리주의적 교리를 통해 귀족이나 왕 같은 특권 계층의 특수 이익을 반대하고 고상한 가치보다 ‘쾌락’ 같은 보통 사람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했다. 군주의 신권이나 토지귀족의 특전보다 대중의 물질적인 이해관계를 존중했다. 이것이 벤담이 사상사에 기여한 공로다. 벤담 사상의 힘 시카고 학파의 토대 公法 개념 도입 영향
제러미 벤담은 초기에 자유주의자로 활동했다. 대출 이자 최고 한도를 5%로 제한하는 입법을 주장한 애덤 스미스를 비판했던 인물이 그였다. 생산과 거래를 좌우하는 것은 자본축적이며, 정부 행동이나 지출은 자본증가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무엇이든 부의 증가를 가져올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벤담은 공리주의에 심취하면서 국가주의로 돌변했다. 공리주의의 선량한 독재, 민주주의 독재를 용인했다.
벤담의 간섭주의 사상은 19세기 중반 ‘철학적 급진주의’로 알려진 개혁단체의 이론적 기초가 됐다. 이 단체는 민주개혁, 교육개혁, 구빈법개혁 등 다양한 개혁정책을 제시하며 영국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던 지적 운동단체였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회주의 실험을 수행하기 위한 입법기술을 좌파진영에게 가르쳤다. 점진적 방법으로 사회주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페이비언사회주의의 사상적 토대도 공리주의다.
공리주의의 지적 운동과 공리주의를 기초로 한 사회주의 지적 운동으로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믿음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개인의 자유 대신에 공리의 원리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의회의 자율은 무제한의 권력 행사로 돌변했고 산업의 규제, 금융 규제 등 국가 활동도 확대됐다. 19세기 말 빈곤층에 대한 복지지출이 대폭 증가한 것도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 영향이었다.
오늘날 경제교육의 핵심이 되고 있는 주류경제학은 쾌락이나 효용과 행동 결과를 중시하는 측면에서 벤담의 공리주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경제학의 꽃이라고 부르는 후생경제학도 공리주의가 말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대 비용-편익 분석을 기초로 해 등장한 시카고학파 법경제학의 사상적 토대가 된 것도 벤담의 공리주의다.
벤담의 사상으로 법 개념도 변했다. 원래는 사법(私法)과 같이 타인의 침해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정의의 준칙만을 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등장으로 복지정책, 물가나 생산규제 등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까지도 법 테두리 안으로 포함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법을 버리고 공법(公法)을 중시하거나 아예 두 법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 현상도 공리주의 때문이다. 법 개념의 혼란은 사법을 기초로 하는 시장경제엔 악영향을 미쳤다.
민경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