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맛없으니 바꿔줘…안된다고?" 정여사님, 반이나 드시고 이러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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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의 비애
"내가 누군지 알아, 밤길 조심해" 폭언에 웃어도 웃는게 아니야
부자 고객 대하는 증권사PB "乙은 언감생심 癸신세" 한탄
3만9원 인출에 3만10원 줬더니 잘못 줬다며 반성문 쓰라고 소란
무리한 민원 처리 못한다 했더니 개인 전화로 밤낮없이 폭언 문자
"내가 누군지 알아, 밤길 조심해" 폭언에 웃어도 웃는게 아니야
부자 고객 대하는 증권사PB "乙은 언감생심 癸신세" 한탄
3만9원 인출에 3만10원 줬더니 잘못 줬다며 반성문 쓰라고 소란
무리한 민원 처리 못한다 했더니 개인 전화로 밤낮없이 폭언 문자
증권사 강남지점에서 프라이빗뱅커(PB)로 일하는 김 과장. 부자 고객을 하늘 같은 ‘갑’으로 모셔야 하는 그는 ‘계’로 통한다. 말 끝마다 “을이나 병은 언감생심, 내 위치는 10간(干)의 끄트머리인 계”라고 떠들고 다녀서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마지막 그 ‘계(癸)’ 말이다.
김 과장은 어느 날 오후 고객이 사무실에 놓고 간 가방을 발견했다. 여직원에게 돌려주고 오라고 부탁했다. 심부름을 다녀온 여직원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객이 “왜 내 가방에 손을 대? 담당 PB 오라고 해”라고 화를 내며 심한 모욕을 당했다는 것. 고객은 최근 투자 손실을 본 데 대한 화풀이를 여직원에게 한 것이다.
“주가 등락을 어떻게 100% 맞힙니까. 주가 전망을 설명할 땐 모두 녹취하고 매수 결정도 고객이 직접 내립니다. 그런데도 주가가 떨어지면 온갖 욕을 먹어야 합니다. ‘설명이 부족했다’ ‘올라간다고 해서 샀는데 이제 어쩔거냐’ ‘사기를 쳤다’…. 울컥하지만 증권사 평판 때문에 대응할 수도 없어요.” 김 과장의 푸념이다.
소비자가 ‘왕’인 시대. 상품이나 서비스를 많이 팔기 위해선 시녀와 시종이 돼야 한다. 이들을 ‘감정 노동자’라고 부른다. 배우가 연기하듯 속내를 감추고 항상 웃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대기업 임원의 항공기 승무원 폭행 사건을 계기로 감정 노동자들의 근무 여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감정 노동자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융회사 직원, 간호사, 전화상담원, 식당종업원, 판매원 등 매일 한 번쯤은 접하는 사람들이다. 국내에만 600만명에 이른다는 추계도 있다.
◆막무가내와 억지에 매일 멍든다
김 과장이 털어놓은 또 다른 얘기. “강북지점 직원으로부터 들었는데, 50억원 정도 굴리는 고객이 있었답니다. 이 고객은 지점장에게 예쁜 여직원과 함께 식사하러 나오라고 했답니다. 무례한 요구지만 지점장도 함부로 할 수 없었고요. 강북지점은 수십억원대 자산가 한 명이 지점 한 곳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죠.”
감정 노동을 하는 김 과장, 이 대리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고객 유형은 ‘블랙 컨슈머’다. 제품을 구매한 뒤 상습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대형마트에 근무하는 사원 B가 당한 블랙 컨슈머 사례는 이렇다. 어느 날 다섯 봉지가 들어있는 라면 묶음을 산 고객이 찾아왔다. 그는 다짜고짜 “점장 나오라고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가 요구한 건 환불이었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점장이 나오자 그는 비로소 환불 이유를 말했다. “너무 맛이 없어 못 먹겠다”였다. 문제는 이미 라면 세 봉지를 먹은 뒤였다는 것. 사과와 설득을 반복한 끝에 그 고객은 결국 두 봉지만 남은 제품을 다섯 봉지가 꽉 들어찬 새 제품으로 교환해갔다. B는 “고객은 끝까지 맛 없는 라면을 세 봉지나 먹은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식품업체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C도 최근 비슷한 사례를 경험했다. 한 고객이 “소스가 든 유리병을 떨어뜨렸는데 병이 깨졌다”며 거칠게 항의했다. ‘유리병이 깨졌는데, 왜?’라고 생각한 그에게 고객은 “왜 소스 병을 깨지는 소재로 만들었냐. 다칠 뻔했으니 보상해달라”고 요구했다. C는 결국 수원에 살고 있던 고객에게 새 제품을 직접 가져다줘야 했다.
◆‘9원’어치 동전을 달라는 ‘황당’ 고객
은행 창구에서 일하는 E에게 한 고객이 ‘3만9원’의 예금 인출을 요청했다. E는 끝전(1원 단위)을 반올림해 3만10원을 지급했다. 현재 1원, 5원짜리 주화는 일반 상거래에서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1992년 이후 이 주화들을 만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객은 정확하게 3만9원을 지급하지 않았다며 소란을 피웠다. 또 고의로 업무를 지연시킨다며 E에겐 반성문을, 지점장에겐 사과를 요구했다. 좋은 지적을 해줬으니 사은품도 달라고 했다. 그 고객은 2007년 1월부터 2010년 8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같은 방식으로 끝전 민원을 제기한 상습범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호텔리어인 G대리도 황당한 고객을 자주 겪는다. “짐을 들어주는 직원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추가 비용 없이 한 등급 더 높은 방을 달라는 고객도 있어요.” 그는 “호텔을 평가하는 인터넷 카페 운영자들이 와서 무료 숙박권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악평을 쓰겠다’고 협박하기 일쑤”라고 전했다.
◆‘난 이미 전과자’라며 협박하는 고객
김 과장, 이 대리들이 고객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시달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동통신사 고객센터에서 근무하는 M은 최근 식은 땀이 나는 경험을 했다. 고객이 ‘터널에서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는 불만을 접수했다. 확인 결과 신호 상태는 정상이었다.
정상이라고 안내했으나 고객은 이후에도 수차례 불만을 제기하며 가입 해지를 요구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그는 고객센터에 직접 찾아와 ‘교도소에서 출소한 전과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난동을 부렸다.
M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줬다. 고객은 밤낮 관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 민원인을 처리하는 동안 극심한 불안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다른 통신사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I는 장기간 요금을 내지 않은 고객에게 문자로 요금납부 안내를 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고객은 욕설을 퍼부으며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약속한 날짜에 요금을 내지 않아 또 안내 문자를 보내자 “또다시 문자를 보내면 낫을 들고 갈 테니 알아서하라”며 주소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뉴스에서처럼 ‘묻지마 살인’을 당하지 않을까 정말 불안했다”고 하소연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고객들도 적지 않다. 의류업체 고객센터에서 장 대리는 1주일에 한 번씩 같은 고객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특별한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규칙적으로 전화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어느 날 그 고객이 고백했다. “자꾸 고객센터에 전화한다고 딸이 뭐라고 해요. 하지만 외로워서 또 전화하게 됩니다.” 문제는 외로움, 마음의 병이었던 것이다. 장 대리는 “세상에 이유 없이 전화를 잘 받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우리 같은 사람에게 전화해 위로를 받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이젠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힘들어했다.
전설리/박신영/황정수/박한신 기자 sljun@hankyung.com
김 과장은 어느 날 오후 고객이 사무실에 놓고 간 가방을 발견했다. 여직원에게 돌려주고 오라고 부탁했다. 심부름을 다녀온 여직원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객이 “왜 내 가방에 손을 대? 담당 PB 오라고 해”라고 화를 내며 심한 모욕을 당했다는 것. 고객은 최근 투자 손실을 본 데 대한 화풀이를 여직원에게 한 것이다.
“주가 등락을 어떻게 100% 맞힙니까. 주가 전망을 설명할 땐 모두 녹취하고 매수 결정도 고객이 직접 내립니다. 그런데도 주가가 떨어지면 온갖 욕을 먹어야 합니다. ‘설명이 부족했다’ ‘올라간다고 해서 샀는데 이제 어쩔거냐’ ‘사기를 쳤다’…. 울컥하지만 증권사 평판 때문에 대응할 수도 없어요.” 김 과장의 푸념이다.
소비자가 ‘왕’인 시대. 상품이나 서비스를 많이 팔기 위해선 시녀와 시종이 돼야 한다. 이들을 ‘감정 노동자’라고 부른다. 배우가 연기하듯 속내를 감추고 항상 웃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대기업 임원의 항공기 승무원 폭행 사건을 계기로 감정 노동자들의 근무 여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감정 노동자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융회사 직원, 간호사, 전화상담원, 식당종업원, 판매원 등 매일 한 번쯤은 접하는 사람들이다. 국내에만 600만명에 이른다는 추계도 있다.
◆막무가내와 억지에 매일 멍든다
김 과장이 털어놓은 또 다른 얘기. “강북지점 직원으로부터 들었는데, 50억원 정도 굴리는 고객이 있었답니다. 이 고객은 지점장에게 예쁜 여직원과 함께 식사하러 나오라고 했답니다. 무례한 요구지만 지점장도 함부로 할 수 없었고요. 강북지점은 수십억원대 자산가 한 명이 지점 한 곳을 먹여 살리기 때문이죠.”
감정 노동을 하는 김 과장, 이 대리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고객 유형은 ‘블랙 컨슈머’다. 제품을 구매한 뒤 상습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대형마트에 근무하는 사원 B가 당한 블랙 컨슈머 사례는 이렇다. 어느 날 다섯 봉지가 들어있는 라면 묶음을 산 고객이 찾아왔다. 그는 다짜고짜 “점장 나오라고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가 요구한 건 환불이었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점장이 나오자 그는 비로소 환불 이유를 말했다. “너무 맛이 없어 못 먹겠다”였다. 문제는 이미 라면 세 봉지를 먹은 뒤였다는 것. 사과와 설득을 반복한 끝에 그 고객은 결국 두 봉지만 남은 제품을 다섯 봉지가 꽉 들어찬 새 제품으로 교환해갔다. B는 “고객은 끝까지 맛 없는 라면을 세 봉지나 먹은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식품업체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C도 최근 비슷한 사례를 경험했다. 한 고객이 “소스가 든 유리병을 떨어뜨렸는데 병이 깨졌다”며 거칠게 항의했다. ‘유리병이 깨졌는데, 왜?’라고 생각한 그에게 고객은 “왜 소스 병을 깨지는 소재로 만들었냐. 다칠 뻔했으니 보상해달라”고 요구했다. C는 결국 수원에 살고 있던 고객에게 새 제품을 직접 가져다줘야 했다.
◆‘9원’어치 동전을 달라는 ‘황당’ 고객
은행 창구에서 일하는 E에게 한 고객이 ‘3만9원’의 예금 인출을 요청했다. E는 끝전(1원 단위)을 반올림해 3만10원을 지급했다. 현재 1원, 5원짜리 주화는 일반 상거래에서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1992년 이후 이 주화들을 만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객은 정확하게 3만9원을 지급하지 않았다며 소란을 피웠다. 또 고의로 업무를 지연시킨다며 E에겐 반성문을, 지점장에겐 사과를 요구했다. 좋은 지적을 해줬으니 사은품도 달라고 했다. 그 고객은 2007년 1월부터 2010년 8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같은 방식으로 끝전 민원을 제기한 상습범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호텔리어인 G대리도 황당한 고객을 자주 겪는다. “짐을 들어주는 직원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추가 비용 없이 한 등급 더 높은 방을 달라는 고객도 있어요.” 그는 “호텔을 평가하는 인터넷 카페 운영자들이 와서 무료 숙박권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악평을 쓰겠다’고 협박하기 일쑤”라고 전했다.
◆‘난 이미 전과자’라며 협박하는 고객
김 과장, 이 대리들이 고객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시달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동통신사 고객센터에서 근무하는 M은 최근 식은 땀이 나는 경험을 했다. 고객이 ‘터널에서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는 불만을 접수했다. 확인 결과 신호 상태는 정상이었다.
정상이라고 안내했으나 고객은 이후에도 수차례 불만을 제기하며 가입 해지를 요구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그는 고객센터에 직접 찾아와 ‘교도소에서 출소한 전과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난동을 부렸다.
M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줬다. 고객은 밤낮 관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 민원인을 처리하는 동안 극심한 불안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다른 통신사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I는 장기간 요금을 내지 않은 고객에게 문자로 요금납부 안내를 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고객은 욕설을 퍼부으며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약속한 날짜에 요금을 내지 않아 또 안내 문자를 보내자 “또다시 문자를 보내면 낫을 들고 갈 테니 알아서하라”며 주소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뉴스에서처럼 ‘묻지마 살인’을 당하지 않을까 정말 불안했다”고 하소연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고객들도 적지 않다. 의류업체 고객센터에서 장 대리는 1주일에 한 번씩 같은 고객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특별한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규칙적으로 전화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어느 날 그 고객이 고백했다. “자꾸 고객센터에 전화한다고 딸이 뭐라고 해요. 하지만 외로워서 또 전화하게 됩니다.” 문제는 외로움, 마음의 병이었던 것이다. 장 대리는 “세상에 이유 없이 전화를 잘 받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우리 같은 사람에게 전화해 위로를 받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이젠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힘들어했다.
전설리/박신영/황정수/박한신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