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쪽 외곽의 10층짜리 건물은 농업 무역회사인 에너지코와 반자이 벤처투자 등 2000개 회사를 수용하고 있다. 이 중 1400여개 회사가 ‘우편함 990’을 공동 사용한다. 조세 회피를 목적으로 기업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주소만 옮겨놓은 이른바 ‘우편함 회사’인 까닭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9일 법인세율이 낮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에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가 크게 늘고 있지만, 조세 회피의 수단일 뿐 실제 투자로 연결되는 돈은 미미하다고 보도했다.

FT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인용, 지난해 말 기준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에 투입된 FDI 금액이 5조8000억달러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이는 미국 영국 독일을 합친 5조4000억달러보다 많은 규모이지만, 실제 경제에 흘러들어간 돈은 네덜란드 5730억달러, 룩셈부르크 1220억달러에 불과하다. 지난해 전체 FDI 규모 중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나머지 5조1050억달러의 외국인 자본은 세금 회피를 목적으로 만든 특수목적법인(SPC) 등으로 흡수됐다. 네덜란드 중도좌파 노동당의 디드리크 삼솜 대표는 “네덜란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회사들에 지나치게 낮은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는 지난 20년간 시스코, 스타벅스, 구글, 이케아, 토미힐피거, 러시아 통신그룹 빔펠콤 등의 회사들이 절세를 목적으로 소규모 자회사를 두고 있다. 이와 관련, 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은 지난달 “절세 전략은 대개 합법적이지만 조세수입이나 조세통치권, 조세정의 등에 심각한 위협이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FT는 법인세율이 낮은 나라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재정이 악화된 나라들이 법인세를 더 깎아주는 등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어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