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록터앤드갬블(P&G) 하청업체인 모노솔의 스콧 베닝 대표는 지난 5일 P&G 최고구매담당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앞으로 P&G에 제공한 물품의 대금 지급 기간을 30일 늦추는 데 협조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베닝 대표는 잠시 눈앞이 깜깜했다. 현금이 한 달 늦게 들어오면 당장 인건비와 제조비용을 어디서 충당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는 편지의 끝을 읽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단, P&G가 지정한 은행에 0.2%의 수수료를 내면 기존보다 30일 빨리 납품 대금을 받을 수 있다’는 옵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8일 미국 최대 생활용품 제조업체 P&G가 중소 하청업체와 지급기간 연장에 관한 협의를 하고 있다고 단독 보도했다. P&G의 대금 지급 연장은 수년간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현금 운용에 목마른 미국 대기업이 중소 하청업체와의 상생 방안을 고민한 결과라고 WSJ는 설명했다.

○은행이 중개 땐 15일로 단축

美 P&G, 협력사 7만5000곳과의 '상생 실험'…대금 결제 한달 늦춰 현금확보
질레트 면도기, 팸퍼스 기저귀, 비달 사순 샴푸 등 50여개의 브랜드를 거느린 P&G는 매출 837억달러(약 94조788억원)의 글로벌 기업. 협력사만 해도 7만5000개에 달한다. P&G는 그동안 하청업체가 청구서를 보내오면 통상 45일 내에 현금으로 대금을 지급해오다 앞으로는 75일 뒤에 주기로 정책을 바꿨다. P&G는 지급 기간 연장으로 확보한 연 20억달러(약 2조2500억원)의 현금을 해외 공장 증설에 투자하거나 주식환매 비용으로 쓰는 등 회사의 운용자금으로 활용할 것으로 전해졌다.

P&G의 ‘75일 지급 기간 정책’은 오는 7월부터 시작해 2014년 4월 모든 하청업체에 적용된다. 대금 지급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기존처럼 청구서를 보낸 뒤 75일을 기다려 대금을 받는 방식과 은행에 0.2%의 수수료를 낸 뒤 15일 만에 받는 방식이다. 예컨대 하청업체가 1000만달러를 청구할 경우 P&G에 청구서를 보내면 75일 후 P&G로부터 직접 1000만달러를 받을 수 있다. 은행에 청구서를 보내면 15일 뒤 은행으로부터 998만달러를 받는 식이다. 후자의 경우 P&G는 1000만달러를 75일 뒤 은행에 내게 된다.

○다른 업계에도 영향 미칠 듯

P&G는 협력사에 저금리 대출을 제공하는 방안도 은행과 협의 중이다. WSJ는 미국 내 은행은 P&G와 같은 높은 신용등급을 가진 기업에 1.3%의 저금리 대출을 확대하는 추세라고 보도했다. P&G 측은 “지급 기간을 75일로 늘릴 경우 하청업체들이 받을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은행을 자금 중개 창구로 활용하는 것”이라며 “우리와 하청업체 간 ‘윈-윈 전략’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P&G의 사례는 미국 내 다른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존 에이헌 씨티그룹 글로벌무역부문 대표는 “대출로만 먹고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현금 자산 확보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라며 “대기업은 장기적인 자산 투자 전략을 짤 수 있고 중소기업은 자생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P&G의 경쟁사인 킴벌리클라크, 처치앤드와이트, 에너자이즈홀딩스, 뉴웰 등은 납품 대금 지급 기간을 늘리기로 하청업체들과의 합의를 마쳤다. 에너자이저와 뉴웰은 이를 통해 각각 2억달러, 1억달러의 운전자산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화학기업 듀폰의 닉 파난다키스 최고재무책임자는 “회사에 현금이 남아도는데 아무 투자도 하지 못하고 손 놓고 있을 기업인은 없을 것”이라며 “듀폰은 지급 기간 연장으로 260억달러의 운전자산을 이미 확보했다”고 밝혔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