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4월 어느 토요일. 경기 화성군산림조합에서 일하던 장일환 씨(당시 28세·현 산림조합중앙회장)는 집 문을 열고 들어서다 깜짝 놀랐다. 봄 조림사업 출장이 예정보다 길어져 보름 만에 찾은 집이었다. 신혼 살림살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내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집을 잘못 찾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관의 낡은 구두는 자신의 것임이 분명했다. 처가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내는 그곳에 있었다. 그가 산림 조성을 위해 출장을 가고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도둑이 든 것이었다. 이부자리까지 싹 들고 갔다. 돌아와서 집안을 둘러본 아내는 덜컥 겁이 나 친정으로 가버렸다. 결혼 2년차 때 일이다.

“조합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1년의 절반은 산에서 살았죠. 자전거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나무 심기 지도를 하다 보면 집에 들어갈 짬을 내기 힘들었거든요.”

장일환 산림조합중앙회장(75)은 1964년 산림조합에 입사해 50년째 산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산사람’이다. 2004년 11월 산림조합중앙회 회장에 올라 3대(9년)째 연임이다. 그가 맛있는 만남의 장소로 택한 식당도 중앙회 근처 ‘싸릿골 산채왕’이라는 산나물 전문점이었다. 곰취 참취 병풍취 다래순 명이나물 산민들레…. 평상시 잘 들어보지 못한 나물 이름이 메뉴판에 적혀 있었다. ‘사찰음식이 아닙니다. 궁중음식도 아닙니다. 그렇다 해서 대중음식도 아닙니다. 다만 주옥 같은 우리 음식일 뿐입니다’라는 식당 벽면 글귀는 음식점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장 회장이 늘 고정적으로 앉는 식탁이 있지만 이날만은 얘기하기 편한 데로 가자며 안쪽 방석이 놓인 자리로 안내했다.

그는 농촌(경기 화성) 출신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산과 인연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느 어린이처럼 꿈이 뭐냐고 하면 큰 의미 없이 대통령 교장선생님이라고 답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이 관솔(송진이 함유된 붉고 기름진 소나무) 참나무 등을 함부로 베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강산이 황폐화되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은 많았다고 한다.

고교를 마치고 화성조합에 서무직으로 들어갔지만 볼펜만 잡는 일만 할 수는 없었다. 워낙 산이 헐벗었던 탓이다. “1960년대만 해도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라 삼천리 황폐강산이었어요. 그래서 조림사업이 지역의 최대 현안이었습니다.”

상에 나물이 하나하나 놓이기 시작했다. 그는 산채의 효능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형적인 무공해 웰빙식품입니다. 성인병도 예방하고요. 농약이나 비료 없이 산에서 채취해 먹으니 이만큼 몸에 좋은 게 없죠. 제가 10년은 젊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당시 주민들은 누구나 돌아가며 나무를 심어야 했다. 일을 하다 보니 점점 재미가 붙어갔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붉은 산을 내가 조금씩 푸르게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도 생겨났다. 1년에 100㏊(1㏊=1만㎡) 이상씩 맡아 조림을 했다. 서울 상암동 축구장 100개 정도 크기다. 심는다고 다가 아니다. 여름이면 말라 죽지 않도록 하예작업(밑풀깎기)도 해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밖에서 일하다 보면 지인들조차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색이 변했다. “한창 나무 심을 때는 모자를 써도 최소 두 번 이상은 얼굴 피부가 벗겨져요. 그 정도는 돼야 조림이 끝나죠. 봄볕에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 내놓는다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나더군요.”

산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절이라 농민들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무를 심을 때는 대부분 춘궁기였어요. 아침 때꺼리조차 없는 사람들이 ‘나무는 무슨 나무냐’고 툴툴거리기 십상이죠.” 장 회장은 아침이면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오늘은 꼭 나오라고 설득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취나물과 산민들레를 한 젓가락 입에 넣어봤다. 쌉쌀하면서도 자연의 싱그러운 맛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심은 나무는 100만그루가 넘는다. 산 예찬론으로 이어졌다. “한국인들에게 산은 곧 나고, 나는 곧 산입니다. 산속에서 태어나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왔어요.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서양 사람들과 달리 우리에게 산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 같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그래서 우린 ‘산에 들어간다’, 입산(入山)이라고 표현하곤 했죠.”

산의 경제적 효과도 소개했다. “우리는 숲에서 직간접적으로 매년 109조원에 해당하는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국내총생산의 9%가 넘죠. 국민 한 사람당 216만원 정도입니다. 맑은 공기, 맑은 물만 해도 어딥니까.”

대화 도중에 훈제오리와 조림두부가 나왔다. 산채정식에 같이 나오는 건데 장 회장은 훈제오리를 명이나물에 싸 먹을 것을 권했다. 간장에 삭힌 듯한 명이나물과 오리의 맛이 오묘한 조화를 이뤘다.

그는 1971년 양평화성군산림조합 상무에 이어 1980년에는 화성산림조합장에 올랐다. 14년간 지역조합장을 지내다 1994년 중앙회로 진출했다.

장 회장에게 가장 보람 있었던 기억은 중앙회가 신용사업(금융업)을 시작한 일이다. 그가 막 중앙회 상임이사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농협 수협은 이미 신용사업에 진출했지만 산림조합만 뒤처져 있었다. 정부는 산림조합중앙회가 돈벌이에만 급급해 조림사업을 뒷전으로 미루지 않을까 우려했다. 법 개정과 상호금융 점포 개설에 정신 없는 시간을 보냈다. “1994년 11월 경기 파주시와 이천시 산림조합이 어렵사리 상호금융 개점식을 연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산림조합 백년대계를 위한 초석을 다진 겁니다. 나무 심는 데는 기간이 오래 걸립니다.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지만 부족해 신용사업으로 산림투자자에게 저리의 금융 지원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1997년에는 철탑산업훈장도 받았다. “평생 나무를 심고 가꾼 데 대한 보상이랄까요. 입사 후 30여년을 산주, 임업인과 함께 살아왔죠. 산림의 무한한 가치를 임업인들에게 알리고 이들의 부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목재 자급률 겨우 15%…기반시설도 태부족"

2004년 산림조합중앙회장에 당선됐다. 하지만 이때부터 정말 피곤한 날들이 시작됐다고 한다. “정책 자금에 대한 감사와 자회사 문제 등으로 산림조합의 공신력이 땅에 떨어졌을 때였어요. 경영 여건도 나빠져 운영 재원 마련조차 버거웠죠. 당선된 기쁨도 잠시, 눈앞에 산적한 과제 때문에 잠을 설친 날이 많았어요.”

나물을 담은 접시들이 간간이 바닥을 드러내자 인심 좋은 사장님이 나물을 더 얹어주며 밥 공기도 내밀었다. 쌀과 보리쌀이 섞여 있었다. 요즘 세대 입맛을 생각해서인지 보리쌀이 그렇게 많진 않았다. 참기름과 깨소금이 들어 있는 사발에 밥을 반 그릇가량 넣었다. ‘앗!’ 그런데 이상했다. 상위에는 간장그릇만 하나 있었다. “여기는 나물의 깊은 맛을 느끼라고 고추장은 안 내놓습니다. 달걀 프라이 나올 거란 기대도 일찌감치 접으세요. 허허.”

한국 산림의 우수성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한국을 독일 영국 뉴질랜드와 함께 세계 4대 조림국으로 꼽고 있다. 남한 면적 1000만㏊ 중 산림면적은 637만㏊(2010년 기준). 임업 선진국인 일본의 산림면적 비율이 68%이고 독일 32%, 스위스는 30% 정도다. 산림면적만으로 보면 임업 선진국에 버금간다.

하지만 장 회장은 목재 자급률이나 산림을 가꿀 기반시설인 임도(산내 도로) 측면에서는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목재 자급률은 15%(2011년 기준)로 85%를 외국 목재에 의존하는 현실입니다. 임도는 ㏊당 2.8m에 불과하죠. 일본이 13m, 오스트리아 45m, 독일은 46.2m입니다. 제일 중요한 산림경영 기반시설인데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죠. 잘 키워 놓고도 나무를 베어 내려올 길이 없습니다.”

식사가 끝나감을 알리듯 숭늉이 나왔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이르자 식목일 얘기를 꺼냈다. “올해로 68회입니다. 공휴일에서 빠진 건 아쉽지만 나무를 심어보세요. 뿌리가 짧으면 땅을 좀 덜 파고, 길면 깊게 파야 합니다. 흙을 덮을 때는 위에서 파낸 흙을 먼저 넣어야 해요. 그러고선 나무 뿌리를 편안하게 잡아당겨 잘 밟아줘야 합니다.”

장 회장의 산 사랑은 죽어서까지 이어질 듯하다. “저는 죽어서도 산에 살 겁니다. 산에 집도 마련해 뒀어요. 경기 양평군 하늘숲추모원 수목장림이 그곳입니다.”


장일환 회장의 단골집 싸릿골 산채왕 원추리·곰취 등 자연산 산나물 가득

서울 석촌2동에 있는 자연산 산나물 전문 식당이다. 인공조미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천연의 맛을 자랑한다. 잡내가 없고 산촌의 향기가 느껴지는 토속적인 맛이 일품이다. 산채 농산물 유통업을 하는 이상문 씨와 아내 송명호 씨가 3년 전 차렸다. 식당명은 송씨 친정이 있던 강원 평창군 진부리의 싸릿골 이름을 따왔다.

산채전문점은 진한 양념을 하지 않는 특성상 재료가 생명이다. 산채왕은 전국 각지에서 산채를 직접 확보해 100% 자연산을 보증한다. 이씨는 “산지에 가도 100% 자연산은 없을 정도”라며 “산채 유통업을 하는 덕분에 재료 확보가 쉽다”고 말했다. 산채왕에선 가시오갈피 햇순, 원추리 등 평소 쉽게 접하지 못하는 산채도 맛볼 수 있다. 짜지 않은 간장에 절인 명이나물이나 곰취에 싸서 먹는 맛이 일품이다.

이씨는 “싸릿골 산채왕을 찾는 고객들도 남겨서는 안 되는 귀한 음식임을 알고 알뜰히 드신다”며 “그 덕분에 음식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산채정식에는 갖가지 산나물과 훈제오리구이, 더덕구이가 함께 나온다. 산채정식뿐 아니라 산채 낙지볶음, 산채 두부전골, 산채 버섯전골 등도 인기다. 산채정식 가격은 1만2000원, 산채비빔밥은 7000원이다. 본점(02)423-8258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