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보기술(IT)계의 ‘구루(Guru)’ 스티브 잡스. 지난 2011년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잡스를 영면으로 이끈 병은 이름도 생소한 ‘췌장신경내분비종양’이었다.

당초 잡스는 2003년 10월 우연히 비뇨기과 검사를 통해 암을 발견했다. 보통 진단까지 5~7년이 걸리고 설사 진단에서 발견돼도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된 상태가 많은데 잡스는 다행이 정기 신장검사 덕분에 전이 이전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잡스는 수술이 가능한 상태였지만 발견 초기 수술을 거부하는 바람에 9개월 만에 종양이 커져 췌장에서 간으로 전이가 되고 말았다.

잡스는 약물치료를 받으며 8년간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지키며 삶과 꿈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잡스의 사망과 투병은 췌장신경내분비종양을 세계에 알리고, 이후 치료법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신경내분비종양(NET)은 인체 모든 기관에 분포해있는 신경내분비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해 생기는 질환이다. 우리 몸은 신체 활동을 조절하는 신경계와 신체의 호르몬을 조절하는 내분비계의 협력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한다. 이런 신경계와 내분비계 모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이한 세포가 바로 신경내분비세포다.

신경내분비종양은 초기에 수술로 종양을 제거하면 완치될 수 있다. 하지만 진단이 어렵다 보니 다른 부위로 이미 전이된 상태에서 종양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는 수술이 불가능하거나 수술을 하더라도 효과가 제한적이다. 이 상황에서는 종양의 성장을 억제하고 증상을 효과적으로 관리해 생존기간을 연장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치료 목표가 된다.

최근에는 관련 암세포만을 공격하는 표적치료제가 등장해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노바티스의 표적항암제 ‘아피니토’(성분명:에베로리무스)가 대표적이다. 아피니토는 췌장신경내분비종양환자 410명이 참여한 대규모 임상을 통해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했다. 해당 치료제 중 가장 큰 규모다.

임상 결과 종양의 성장이 없는 무진행생존기간(PFS)이 11개월로 비교 위약군 4.6개월 대비 2배 이상의 효과가 나타났다. 암 진행 위험도를 65%까지 줄여 치료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됐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3월1일부터는 진행성 췌장신경내분비종양 1차 치료제로 보험급여가 적용되고 있다.

아피니토는 종양의 증식과 신진대사, 새로운 혈관생성에 있어 중앙조절자 역할을 하는 mTOR 단백질을 공격하는 표적치료제다. mTOR 단백질의 활성화를 차단하면 세포 증가에 필요한 각종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못해 세포 성장과 증식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작용원리를 바탕으로 아피니토는 췌장신경내분비종양 이외에 다른 암종에서도 효과가 입증돼 현재 국내에서 총 5개 질환 치료제로 승인, 사용되고 있다.

췌장신경내분비종양은 조기 진단과 조기 치료가 중요한 만큼 복통과 설사, 얼굴홍조 등의 증상이 개선되지 않을 때는 검사를 받는 게 좋다. 또한 다른 수술이나 내시경 검사를 받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정기 건강검진을 빠뜨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50~55세 여성은 폐경기 증상으로 오해해 뒤늦게 진단받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