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오너가 대표이사나 등기임원을 맡지 않으려는 기류가 유통업계에 확산되고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지난 15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임원 및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데 이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22일 롯데쇼핑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

신 회장이 7년 만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롯데쇼핑은 당초 ‘4인 대표이사 체제’에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이인원 그룹 정책본부 부회장, 신헌 사장 등 ‘3인 대표이사 체제’로 재편됐다. 신 총괄회장은 이날 임기 2년의 등기임원으로 재선임됐다.

롯데쇼핑 관계자는 “신 회장의 대표이사직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며 “전문경영인인 신헌 사장이 실질적인 대표이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신 회장은 롯데케미칼과 롯데제과 등 다른 계열사 대표이사는 계속 맡는다”며 “롯데쇼핑과 관련해서는 신사업 발굴과 해외 사업 등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측은 신 회장의 이번 대표이사 사임에 대해 계열사별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재계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는 가운데 유통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대기업 오너와 유통업에 대한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어서다. ‘대기업 빵집’ 논란에 이어 대형 유통업체에 납품하는 입점 업체들의 애로사항을 덜기 위한 정책당국의 감시도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신 회장도 이런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라는 설명이다. 그는 지난해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은 혐의로 약식기소됐다가 정식 재판에 회부돼 다음달 26일 첫 공판을 받는다.

정 부회장이 신세계와 이마트 등기임원에서 물러나기로 했을 때도 재계에서는 비슷한 해석이 나왔다. 정 부회장이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이마트가 직원들을 불법 사찰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것이 등기임원 사임의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대형마트 휴일 의무휴업 등 영업규제가 강화된 데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물가 안정을 위해 협조하라는 압력이 높아졌다”며 “기업 오너에 대한 검찰 수사까지 겹쳐 유통업계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주요 백화점 중 현대백화점은 정지선 회장이 경청호 부회장, 하병호 사장과 함께 각자 대표체제로 회사를 이끌며 오너 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정 회장은 계열사인 현대그린푸드 대표이사를 겸임한다. 정 회장의 동생인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은 현대홈쇼핑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