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이 없어서 못 팔 때였는데 왜 시장에서 나가려 하느냐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요. 난 반드시 ‘토털 패션’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어찌나 반대가 많던지요. 그때 밀어붙여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부산 토종 패션기업 세정의 창업주인 박순호 회장(67)은 최근 부산 장전2동의 일식집 ‘대성관초밥’에서 “이 집은 자연산 생선으로 회를 만들어 제법 맛있다”며 이렇게 옛일을 회고했다. 점심시간에도 붐비는 집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광어회 한 점을 집어든 박 회장은 “세 번 정도 망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1988년에 시장 브랜드 인디안을 토털 패션으로 전환해 전국 대리점을 모집하기로 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이미 시장에서 도매로 잘 팔리고 있던 인디안 제품을 대리점으로 바꿔 소매로 판매하는 데 항의하는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재작년에 ‘열정을 깨우고 혼을 심어라’라는 제목의 책을 낸 것도 열과 성을 다해야만 자기 분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진심을 담아 쓴 것”이라고 했다.

◆시장 도매상에서 로드숍 브랜드로 도약

박 회장은 “요즘도 이 술이 좋다”며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때 건배주였던 ‘천년약속’을 권하며 말을 이었다. “1970~1980년대에는 우리 ‘인디안 티셔츠’를 사러 전국에서 소매상들이 부산진시장에 몰려들었죠. 그런데 그때 시장에서 나가자고 하니까 직원들 3분의 2가 반대했어요. 잘 팔리는 것만 제대로 팔면 되지, 무슨 단독 매장을 내면서 위험을 무릅쓰려 하냐는 얘기였죠.”

잔을 비운 박 회장은 “무려 3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다”며 “전국에 매장을 내는 일, 대리점주들을 설득하는 일, 고객을 사로잡는 일, 브랜드를 알리는 일 뭐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고 말했다.

문어초회와 모둠튀김을 차례로 집으며 박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목소리가 높아졌다. “만약 그때 도매시장에서 빠져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세정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때만큼 어려웠던 게 바로 작년이에요. 경기 불황으로 세정 역사상 가장 사업이 어려웠는데 센터폴과 헤리토리 등 신규 브랜드를 두 개나 내놨죠. 그렇기 때문에 올해는 백화점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다시 한 계단 딛고 올라가는 중요한 한 해가 될 겁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일념으로 박 회장은 작년에 새 브랜드 두 개를 내놓고 써코니 캐터필라 고라이트 등 해외 신발 브랜드 3개를 들여왔다. 옷만 팔던 세정이 신발사업에까지 뛰어든 것이다. 박 회장은 “신발은 인솔(밑창)과 발사이즈 쿠션 디자인 등이 옷과 다르기 때문에 새로 만들기보다는 좋은 브랜드를 들여와서 사업을 벌인 것”이라며 “올해는 처음으로 주얼리 브랜드 ‘디디에두보’도 론칭했다”고 말했다.

갓 부쳐낸 해물파전과 전복버터찜이 나왔다. 평소에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는 박 회장은 해물파전을 집으면서 전복버터찜을 권했다.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찍어 꼭꼭 씹어 먹으면 맛있다고. “회는 생으로 먹는 찬 음식이기 때문에 이렇게 따뜻한 음식과 같이 먹어줘야 해요.”

◆토털 패션기업 지향

박 회장이 바라보는 패션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다. 이 때문에 미국의 러닝화 1위 브랜드 써코니 등을 들여왔고 주얼리 브랜드도 새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주얼리도 패션 아닙니까. 요즘은 옷 잘 입는 사람들도 주얼리를 잘 코디해야 감각적이라고 평가받는 시대입니다. 세정은 옷 모자 신발 주얼리를 하니까 이제 가방만 하면 그야말로 ‘토털 패션 기업’이 되는 겁니다.”

로드숍(가두점)에서 강점을 가진 세정이 왜 백화점 주얼리 브랜드를 론칭한 것일까. 그는 “백화점은 30%대 판매수수료를 내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 돈 되는 유통망은 아니다”며 “그러나 브랜드의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적자가 나더라도 해야 되는 게 백화점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세정의 대표 브랜드인 인디안은 백화점 내 남성 캐주얼 부문에서 매출 상위권이어서 인지도가 낮은 신규 브랜드 등에 비해 백화점 수수료를 적게 내는 편이다. 하지만 신규 브랜드 등은 백화점에 들어가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 데다 수수료도 30~40%를 주기 때문에 이윤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박 회장은 생오이와 생고구마를 씹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요즘 백화점 수수료 때문에 난리죠?” 그는 “예전에 삼성물산에서 하던 SS패션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패션회사가 우리와 같은 콘셉트의 종합패션몰 사업을 한 전례가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백화점의 평균 입점 수수료가 25%인데 한국은 이보다 10~13%포인트 비싼 셈이죠. 어떤 브랜드는 이익률이 1~2%밖에 안 되는 곳도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소비자들이 해외보다 비싼 가격에 옷을 사게 되는 거예요. 우리도 미국처럼 백화점 수수료를 25% 수준으로 낮춰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중국 ‘복수전’ 치르고 2016년엔 매출 2조원

박 회장은 올해 특히 ‘세정종합패션몰’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세정이 갖고 있는 인디안 올리비아로렌 센터폴 헤리토리 NII(니) 크리스크리스티 등 모든 의류 브랜드를 한데 모아 판매하는 ‘멀티숍’ 형태로 기존의 매장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박 회장은 “올해는 헤리토리 키즈도 처음으로 나오는데 3~4세부터 7~8세까지 입을 수 있도록 좋은 품질의 합리적인 제품을 내놓을 계획”이라며 “그러면 키즈부터 초·중·고교생, 대학생, 30대에서 70~80대까지 모든 연령층이 입을 수 있는 제품 라인업을 갖추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새우튀김을 하나 집어든 박 회장은 세정종합패션몰의 이름에 대해 “이것저것 고민 중이라 상표 등록은 다 해놨지만 아직 확정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400개에 달하는 인디안 매장의 간판을 모두 새 상표로 바꿀 계획이다.

"종합 패션몰 준비 … 중국시장 다시 도전할 것"

그는 “화장품으로 치면 CJ올리브영 같은 유통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라며 “유니클로 자라 등 글로벌 제조·직매형 의류(SPA) 브랜드는 직영으로 대형 매장을 운영하는 데 비해 세정은 프랜차이즈 형태로 대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132㎡(40평) 규모였던 인디안 매장도 298~331㎡(90~100평) 수준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박 회장은 “올가을부터 멋진 매장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기존의 인디안을 젊게 만드는 게 아니라 인디안은 매장 안에 숨기고 젊은 유통 브랜드를 만들어 젊은 층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세정종합패션몰에 공을 들이는 또 다른 이유로 중국사업을 꼽았다. “앞으로 종합패션몰이 잘되면 이 유통 브랜드를 앞세워 중국에 다시 한번 들어갈 겁니다. 복수전 한번 제대로 치러야죠.” 세정은 2004년 중국에 인디안 브랜드로 진출했다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중국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업을 접어야만 했던 것. 지난해 1조7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세정은 올해 1조2000억원에 이어 해외에 다시 진출, 2016년엔 국내와 중국을 합쳐 2조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다.

◆요트 패션 브랜드도 내놓을 계획

빈잔에 천년약속을 따라주던 박 회장은 요트 얘기를 꺼냈다. 그는 기반이 없던 대한요트협회에 합류해 10년 동안 회장직을 맡아왔다. “조직도 사람도 체계도 아무 것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가서 제가 고생 좀 했어요. 그런데 올해 또 선출돼서 앞으로 4년을 더 일해야 돼요.”(웃음) 그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이 바로 해양스포츠인데 앞으로는 요트 패션 브랜드도 세정이 만들 것”이라며 “요트산업의 대중화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어느덧 모둠회와 튀김, 해산물 전채가 담긴 그릇을 비웠다. 열기조림과 함께 대구맑은탕이 나오자 박 회장은 “이 열기(볼락)조림이 매콤하니 이 집에서 제일 맛깔나는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건강 관리법을 묻자 그는 “매일 아침 집 인근의 금정산에 1시간 코스로 등산을 한다”며 “매일 하는 편인데 만약 산에 못 가면 골프연습장에 가서 1시간 동안 300개 정도 공을 치고 온다”고 답했다. 상황버섯을 발효시킨 천년약속을 반 병쯤 비운 박 회장은 “오후에 대리점주들과 회의가 있어 오늘은 더 못 마시지만 다음 번엔 소주로 하자”며 악수를 건넸다.


박순호 회장의 단골집 대성관초밥 매콤한 열기 조림에 광어·도미회 신선

박순호 세정 회장이 즐겨 찾는 맛집은 부산 장전2동의 일식집 ‘대성관초밥’이다. 32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는 이 식당은 박 회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 ‘단골’이 된 식당이다. 게다가 자연산 광어 도미 등으로 모둠회를 내주는 점심 코스가 3만원이고 저녁 코스도 비싸지 않아 부산을 찾는 손님을 접대하기에 제격이라고.

일반 횟집에 없는 이곳의 진미는 열기(볼락)를 맛깔스럽게 조림으로 내놓는다는 점이다. 점심 때 정식세트 3만원짜리를 주문하면 샐러드 해산물전채 맑은국 모둠회에 이어 연어 등 구이 요리와 모둠튀김, 열기조림과 밥, 대구맑은탕을 식사로 내온다. 열기조림은 시원한 무와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부드러운 살코기가 밥맛을 돋운다. 식초 간장 과일즙을 섞어 만든 대구맑은탕용 소스도 독특하다. 대구맑은탕 국물에 넣으면 새콤하면서도 간간하게 먹을 수 있다.

저녁 세트는 점심 메뉴에 전복회가 추가되면 4만원, 찜요리가 더해지면 5만원, 초회까지 넣으면 7만원짜리 코스가 된다. 여기에 그날의 추천요리와 튀김요리가 더해진 8만원짜리 세트, 참다랑어 바닷가재가 추가된 10만원짜리까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051)518-4001

부산=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