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어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영어식 표현인 데이비드(David). 몸집은 이름과 달리 ‘골리앗’ 부류지만 걸어온 길은 영락없는 다윗이었다. 존재감 없는 사업 부문을 맡아 휴렛팩커드(HP)와 인텔 같은 거인에 맞서 싸워왔다. “동양인이 큰일을 할 수 있겠어?”라는 비아냥이 들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그 결과 한 번은 2%에 불과한 점유율을 5년 만에 98%로 뒤집었고, 또 한 번은 2년 만에 매출을 1000% 늘려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쯤 하면 ‘최선을 다한 결과’라거나 ‘전략이 들어맞았다’고 할 법하지만 다시 이름 얘기를 한다. 다윗의 뜻처럼 신의 은총(be loved) 덕이라고.

세계 2위의 PC용 반도체 회사인 AMD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아시아태평양 지역 수장이 된 권태영 사장(47)은 “늘 나의 영어 이름을 믿고 무조건 덤빈 게 주효했다”고 했다. 그가 밝힌 또 다른 성공 비결도 겸손의 표현이었다. “운좋게 ‘헝그리 정신’이 남아 있는 조직을 맡아서”라고.

◆만능 스포츠맨

PC용 반도체 시장에서 인텔과 경쟁하고 있는 AMD.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급인 만큼 으레 이공계 출신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공대와는 전혀 무관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서울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테네시주의 오스틴피주립대(APSU)에서 행정학과 마케팅을 전공했다. 테네시주립대 대학원에서 형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법학 강의도 했다.

3개 전공을 이수했지만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건 음악과 미술이었다. 하지만 공군 파일럿 출신인 부친이 “사내 자식이 무슨 그림과 노래냐”며 말리는 통에 예술 공부는 접었다. 대신 아내는 미술을 공부한 사람을 택했다.

그는 운동도 열심히 했다. 180㎝가 넘는 건장한 체구로 미식축구와 야구를 즐겼고, 17세 때는 미국 주니어 태권도올림픽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 권 사장은 “다양한 경험을 한 덕에 어떤 문제 상황에서 여러 해결 방안을 생각하는 습관을 얻은 것 같다”고 했다.

‘해결사’ 기질은 자연스레 컨설턴트 일로 이어졌다. 그는 1995년부터 5년간 영국계 컨설팅 회사인 RCI에서 일했다. 행정학과 법학 전공을 살려 정부와 공공기관 관련 일을 주로 했다.

◆‘깜놀’ 성과로 1년마다 새 감투

컨설턴트 시절인 2000년, 권 사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한참 주가를 날리던 델컴퓨터의 한 임원이 “공공부문에서 일한 노하우를 살려 글로벌 영업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왔다.

“마케팅과 컨설팅을 전공한 사람이 영업을 할 수 있겠냐”며 망설였지만 소비자가 원하는 컴퓨터를 싸게 조립해 만든다는 델의 사업모델에 끌려 전직을 결심했다. 무엇보다 미국을 떠나 고국인 한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주한 미군 담당 영업을 맡으며 2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를 반긴 건 처참한 시장 상황이었다. 시장점유율은 정확히 2%였다. 세계 1위 PC업체인 HP가 한국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델은 HP에 비해 30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권 사장은 본사에서 직접 컴퓨터를 판매하는 델의 영업방식을 십분 활용했다. ‘총판’이라는 중간 판매 조직을 통해 영업하는 HP가 조금 느리게 움직이는 점을 파고들었다. 주문제작 방식이라는 델의 장점을 적극 알리고 한국 상황에 맞는 마케팅 행사도 자주 열었다. 매년 10~20%씩 점유율이 늘더니 급기야 5년 만에 상황을 반대로 만들었다. 2005년 델은 주한 미군 보급 시장의 98%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권 사장은 이후 델의 미국 연방 영업 담당 상무를 거쳐 아시아태평양 마케팅 총괄 사장으로 영전했지만 또 다른 도전을 감행했다. 2010년 인텔에 9 대 1 정도로 뒤져 있던 AMD로 옮긴 것. ‘AMD도 올라갈 일만 남았구나’라고 생각하던 차에 AMD에서 “삼성전자 영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듣고 고민 없이 AMD행을 택했다.

영업에 자신이 붙은 그는 AMD에서 초단기 성공신화를 썼다. 여기서도 시작은 2%였다. 2010년만 해도 삼성전자 PC 100대 중 2대에만 AMD 반도체가 들어갔다. 그랬던 게 2년 만에 20% 이상으로 높아졌다. 매출로 치면 1000%가 늘었다.

전무후무한 기록을 낸 권 사장은 매년 새로운 감투를 썼다. 삼성전자 담당 지사장에 이어 2011년에 AMD 한국지사장을 겸임했고 이듬해 일본 도시바 담당까지 떠맡았다. 그러다 지난 1일 AMD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태평양 총괄 사장으로 승진했다.

◆아태 총괄본부를 한국으로 옮겨

동양인으로 처음 AMD 아태 총괄이 된 권 사장은 처음부터 배짱을 퉁겼다. “한국에서 일하게 해주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엄포를 놨다. AMD는 고민 끝에 수락했고 자연스레 아태 총괄 본부가 권 사장을 따라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옮겨왔다.

“한국에서 살고 싶기도 했지만 회사 내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싶었어요.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도 있는데 제조업체 하나 없는 싱가포르에 아태 총괄 본부가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권 사장의 이런 지론 덕에 AMD는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중 유일하게 한국에 아태 총괄을 둔 회사가 됐다.

‘한국 사랑’은 20년 이상 한국에서 산 권 사장보다 자녀들이 더 크다. 14세인 아들 솔로몬과 한 살 아래인 딸 크리스천 모두 줄곧 미국과 싱가포르 등에서 자랐는데 하나같이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졸랐다.

‘한밤에 창문 밖에서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나. 권 사장은 “아이들도 역동적인 한국 모습과 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를 마음에 쏙 들어한다”며 “피는 못 속이는 것 같다”고 했다.

◆다이아몬드 전법이 성공 전략

권 사장은 모든 일을 술술 풀어갈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상대가 가려워하는 데를 긁어준 덕’이라고 했다. 그는 삼성전자 담당 지사장을 맡았을 때 “정말 한심했다”고 털어놨다. 직원들이 삼성전자 구매팀을 찾아가 매번 “저희 제품 한 번 써주세요”라고 읍소하는 게 영업전략의 전부였다. 인텔이라는 확실한 업체가 있는데 삼성전자 입장에서 AMD를 거들떠보지 않는 건 당연했다.

권 사장은 전략을 바꿨다. ‘삼성에 물건을 팔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삼성 PC를 함께 팔아주자’는 자세로 임했다. 그는 “우리는 가죽을 파는 회사다. 삼성전자가 좋은 가죽으로 만든 명품 가방을 많이 팔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직원들을 교육했다.

그가 내세운 건 다이아몬드 전략이다. 삼성전자 해외법인 직원과 AMD 국가별 담당자 그리고 한국에 있는 삼성전자 본사 직원과 AMD코리아 직원 등 네 당사자를 한데 묶어 네트워크를 쌓도록 했다. 서로 부족한 점이 뭔지 알게 했고 삼성이 약한 나라엔 AMD가 지원 사격을 했다. 처음엔 7~8개국에서만 AMD 제품을 쓰던 삼성도 이제는 45개국 이상에서 AMD 반도체를 넣고 있다.

숫자 4를 좋아하는 권 사장은 직원들에게 ‘4P’를 강조한다. 열정적(passionate)이면서 긍정적(positive)이어야 하고 선제적(proactive)으로 임하는 대신 우선순위를 가려 선별적(prioritized)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을 대할 때 ‘4P’라면 사람을 만날 땐 ‘배관경관’을 강조했다. ‘상대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잘 ‘관찰’하면서 ‘경청’하고 늘 ‘관심’을 가지라’는 주문이다. 권 사장은 “IT 업무 능력보다 인간관계가 좋은 직원을 뽑으려고 노력한다”며 “‘헝그리 정신’이 남아 있는 AMD에 그런 직원들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언제까지 AMD에 있을 거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국에서 일할 수 있으면 끝까지 있어야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애플 담당을 맡기면 그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만둘 겁니다. 삼성전자 덕에 제가 이렇게 컸는데 의리상 그럴 수 없죠.”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