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인물탐구] 고재호 대우조선해양 사장, 전쟁터도 마다 않고 달려간 영업달인
1990년대 초 아프리카 앙골라의 국영 선사인 소난골(SONANGOL)은 자국의 해양 천연자원 개발과 운송을 위한 배가 필요했다. 앙골라 해역은 126억배럴에 이르는 원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는 심해 자원의 보고로 꼽히는 곳이다. 소난골은 전 세계 유수의 조선사들에 배를 만들어줄 수 있는지 타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사 반응은 시큰둥했다.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앙골라의 불안한 정세 때문이었다.

이때 대우조선의 한 영업부장이 모두 꺼리는 앙골라 출장을 자원하고 나섰다. 당시 경영진은 별 기대 없이 “일단 한번 가보기는 하라”며 출장을 허락했다. 그는 면밀한 조사를 통해 앙골라가 거대 시장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난골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계약을 따내기 시작했다. 소난골은 모두가 외면할 때 손을 내밀어 준 대우조선해양에 일감을 몰아줬다. 지금까지 22척의 선박과 해양 구조물(총 122억달러 규모)을 대우조선해양에 발주했다.

그 영업부장은 20년가량 뒤인 지난해 4월 회사의 최고경영자(CEO)에 올랐다. 고재호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얘기다. 사내에서 소문난 ‘영업통’인 고 사장의 취임 첫해, 대우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그룹을 제치고 처음으로 국내 조선업계 수주 1위를 기록했다.

◆위기 속에 빛난 30년 영업통

[CEO 인물탐구] 고재호 대우조선해양 사장, 전쟁터도 마다 않고 달려간 영업달인
고 사장은 1980년 대우조선공업(현 대우조선해양)에 입사하며 영업을 시작했다. 이후 30여년간 주로 해외 영업과 조선소 현장 근무를 했다. 그의 ‘영업 DNA’는 회사 수장이 된 이후 빛을 발했다. 취임 이후 지난해 말까지 60여일을 유럽 아프리카 등 해외 9개국을 돌며 수주 활동을 하는 데 보냈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을 비롯해 해상풍력 세계 1위 기업인 독일 지멘스, 세계 최대 해양시추 기업인 미국 트랜스오션, 석유 메이저인 셰브론과 엑슨모빌 등 ‘큰손’들이 주요 타깃이었다. 셰브론과는 인도네시아에 건립 예정인 조선 설계센터와 관련한 협의도 했다. 고 사장은 “현장인 조선소와 고객인 선주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해외 출장을 자주 간다”고 말했다.

영업통의 진가는 회사가 어려울 때 나타나는 법.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조선 업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당시 그리스 선주 중 일부는 수주협상 막판에 터무니없는 수준의 가격을 제시했다. 거절할 경우 수억달러의 계약을 그대로 무산시키겠다는 으름장도 놨다.

대우조선해양 직원들은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선박사업 부문장이었던 고 사장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영업 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그리스 선주들이 간혹 ‘안 되면 말고’ 식의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위 ‘찔러보기’식 요구에 어쩔 줄 모르고 맞춰준다는 인상을 주면 절대 안 됩니다. 중심을 잡고 제조원가 등 객관적 자료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 가격에 계약이 싫으면 관두라는 식으로 강하게 나갔습니다.”

고 사장의 강단 있는 대응은 효과가 있었다. 무리한 요구를 하던 선주들은 마음을 바꿔 원래 조건대로 선박을 발주했다. 힘든 시기에 회사에 큰 힘이 되는 알짜 수주가 이어질 수 있었다.

물론 고 사장이 배짱만 갖고 영업한 것은 아니다. 까다로운 선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세계 각국의 문화와 비즈니스 매너를 익혔다. 특히 유럽 선주들의 취향을 겨냥해 와인에 대해서는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쌓았다. “해외 선주들과 미팅이 있을 때는 문화나 종교, 역사 등을 미리 공부하고 나갑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매너 하나가 수주를 좌우하기도 하니까요. 계절과 지역에 맞는 와인 한 병은 추천할 수 있어야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현장 경영으로 소통 강화

해외 출장 중이 아니더라도 서울 다동 본사에서 고 사장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는 취임 이후 국내에 있어도 그 시간의 절반가량은 거제 옥포조선소에서 보냈다. “한국의 조선산업은 격변기에 있습니다. 기존의 상선 중심으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하고 또 중요한지에 대한 답은 현장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고 사장은 조선소를 둘러보고 완성 단계인 선박에 직접 승선해 보면서 품질을 체크한다. 현장 근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고충도 직접 듣는다. 야간 작업자를 불시에 방문해 격려하거나 병원을 찾아 산재환자를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노조와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선주사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대목이다. 고 사장 취임 이후 주요 수주 계약식에 노조 관계자들도 함께 참석하고 있다.

고 사장과 임원들은 지난해 11월 기수별 공채사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회사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개선 방향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는 간담회 이후 직원들이 회사 경영에 대해 거침없이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인트라넷에 ‘CEO 우체통’을 만들도록 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처럼 회사도 경영진과 직원 간의 소통에 문제가 없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원들이 마음에서 우러나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CEO의 역할입니다.”

◆해양플랜트 집중 전략으로 불황 극복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목표치(110억달러)보다 30%가량 많은 142억8000만달러의 수주 실적을 거뒀다. 조선 ‘빅3’ 가운데 유일하게 목표치를 초과 달성했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등 경쟁사들은 모두 목표를 채우지 못했다.

특히 전체 수주액의 73.5%인 105억달러를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수주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드릴십, 부유식원유저장설비(FPSO), 고정식 플랫폼(연근해 원유생산설비) 등 고부가가치 해양플랜트를 골고루 수주했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상선에서 해양플랜트 중심으로 변하고 있는 조선산업의 흐름을 가장 잘 따라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 사장은 취임 초부터 세계 최고의 설계·구매·제작·운송·설치(EPCIC) 업체가 되기 위해서는 해양플랜트를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해양플랜트 부문의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는 올해 조선 엔지니어링 업체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단순히 선박을 건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설계까지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겠다는 얘기다.

“올해는 초대형 해양플랜트 설치선을 비롯해 LNG-FPSO, 고정식 플랫폼 등 까다로운 건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는 데 주력할 생각입니다. 서울 마곡단지에 ‘글로벌 R&D센터’를 세워 세계적 수준의 엔지니어링 기술도 확보하겠습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