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간 전국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주변 풍경을 화폭에 담아온 이가 있다. 한국화가 이호신 씨(56)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기법을 따르는 그는 사찰 주변 산세와 지형, 건축물과 조경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사찰 한 곳을 그리려고 며칠씩 보내면서 대웅전 기둥의 수나 주변 조경수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까지 샅샅이 살피는 공을 들여왔다.

사찰 한 곳당 화첩 한 권 분량의 스케치를 했다는 그는 그렇게 모은 밑그림을 토대로 다시 작업실에서 화선지에 묵으로 그림을 그려 수묵채색화를 완성했다. 사찰 100여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화첩에 담아온 그가 그중 83개 사찰을 그린 130여점을 묶어 《가람진경(伽藍眞景)》을 내놓았다.

옛날 서책의 느낌이 들도록 수작업으로 제본한 책장을 양쪽으로 펼치면 그가 그린 사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묵으로 그린 사찰 풍경에는 실제보다 더 깊은 맛을 주는 묘미가 있다. 전경을 한눈에 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전망 좋은 곳으로 사시사철 올라야 했던 이씨의 노고가 경탄스럽기도 하다. 책에는 사찰 창건기나 사찰에 얽힌 이야기, 자신의 감상을 곁들여 읽고 보는 재미가 있다.

“폐사지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일깨운다. 분명 까마득히 먼 옛날 어느 님의 손길이, 숨결이 있었노라고, 세월은 강물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있었노라고. 무엇을 바라고 어떤 꿈을 꾸며 살았는지 정녕 내세를 믿기는 하였는지? 그 님의 손길이, 숨결이 햇살 아래 바람 속에 비낀 탑으로 오롯하나니, 누가 탑속의 사리를 묻는가? 이러구러 변하는 시간만이 진리인 것을.”

강릉 내곡동 신복사지를 둘러본 저자의 소회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선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은 것. 화가의 마음대로 온갖 것을 다 그리듯 우주의 삼라만상 그 무엇이든 모두가 내 마음이 만든 것이다”며 고승대덕들이 세월을 넘어 전해주는 가르침을 되새긴다.

지리산의 하루와 사계절을 그린 《지리산진경(智異山眞景)》도 함께 내놓았다. 동이 터오는 첫새벽의 기운부터 하얀 달이 떠오른 밤의 정취까지, 노란 산수유와 눈부신 벚꽃이 만발한 봄부터 흰 눈에 덮이고 꽁꽁 얼어붙은 겨울까지 지리산의 모든 것을 화폭에 담았다. 유장하게 출렁이는 산맥과 신령한 기운이 충만한 봉우리들, 기운차게 쏟아지는 폭포와 너른 옥토를 적시며 흘러가는 강, 천년 고찰과 민초들이 피눈물을 쏟았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들도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리산의 속살을 20년 이상 그리다 아예 본거지를 지리산 자락으로 옮긴 이씨는 “사찰 그림과 함께 지리산의 생태와 경관을 그림에 담아내는 작업을 본격화해 몇 년 후에는 또 다른 지리산 화첩을 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