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러스킨(1828~1897본명 에피 그레이)을 처음 본 순간 청년화가 존 밀레이(1829~1896)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평생 동안 계속될 운명적 만남의 시작이었다. 훗날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 될 밀레이는 1853년 예술 및 사회비평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의 초대를 받아 그의 부인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여행 중이었다.
평소 산업사회의 무미건조한 삶이 모든 사회적 부조리와 정신적 공황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존 러스킨은 신앙심으로 충만한 중세의 영적 예술과 근대인의 삶을 접목함으로써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존 밀레이라는 라파엘전파의 화가는 바로 자신의 그런 생각을 대변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라파엘전파는 이상화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19세기 영국 화단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고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라파엘로(1483~1520) 이전의 경향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젊은 화가 그룹이었다. 러스킨은 밀레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그의 화풍의 방향성까지 제시하는 멘토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여행에 밀레이를 초대한 것도 아름다운 자연에서 함께 노닐며 라파엘전파의 이상을 심화시키도록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밀레이를 매혹한 러스킨의 부인은 누구나 뒤 돌아 볼 정도로 아름다운 20대 중반의 여인으로 사교계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남편인 러스킨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혼을 한 지 6년이 지났건만 첫날밤 이후 잠자리를 같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중 마담 러스킨은 우연히 옷깃을 스치게 된 호남형의 젊은 화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두 사람은 곧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러스킨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특히 자신이 적극적으로 옹호해준 젊은 화가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인인 마담 러스킨은 1855년 소송을 걸어 러스킨과 갈라서고 기어코 밀레이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이 삼각 스캔들이 몰고 온 파장은 엄청났다. 자신의 후견인의 아내를 뺏어간 밀레이와 대담하게도 자기 남편을 상대로 소송을 낸 마담 러스킨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오죽했으면 빅토리아 여왕은 귀족 신분인 마담 러스킨을 모든 공적 행사와 왕실 접견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했을까. 지금으로선 납득이 안 가는 조치지만 남성중심사회인 빅토리아조에서는 충분히 있음 직한 일이었다. 존 러스킨이 부인과의 동침을 피했던 배경은 뭘까. 이를 두고 전기 작가들은 아직까지도 해묵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러스킨에 대한 평가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별의별 추측성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마담 러스킨은 얼짱이긴 하지만 몸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둥, 역겨운 체취가 났기 때문이라는 둥 낯 뜨거운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 심지어 존 베처러 같은 학자는 러스킨이 소아성애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러스킨이 부인에게 반한 것은 처음 만났을 때의 앳되고 청순한 모습이었는데 결혼할 즈음에는 나이가 들어 그 매력이 반감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담 러스킨을 쟁취한 밀레이는 행복했을까. 물론이다. 두 사람은 8남매를 뒀고 백년해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밀레이는 사치를 즐기고 사교계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부인을 만족시키고 대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밤낮없이 이젤 앞에서 살았다고 한다. 부인은 가계 수입을 늘리기 위해 남편에게 대중의 기호에 영합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배은망덕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밀레이의 예술적 ‘뒷배’ 역할을 했던 러스킨은 밀레이의 이런 변신을 ‘대재앙’이라며 애석해했다. 그렇다면 두 명의 지인에게 버림받은 러스킨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사회비평가이자 예술비평가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빅토리아조 영국 지성사에 한 줄기 굵은 획을 긋는다. 로맨틱한 사랑도 있었다. 39세 때인 1858년 로즈 라 투슈라는 10세의 아일랜드 소녀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가 반한 것은 소녀의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었다. 둘의 만남은 오래도록 지속돼 러스킨은 그가 18세 되던 해 청혼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쓰라림을 맛본다.
전기 작가들의 지적대로 그가 소아성애자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이상 사회를 동경한 그의 편집증적인 집착이 그런 왜곡된 사랑의 방정식을 낳았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그가 말년에 정신적 파탄에 빠져든 것도 그런 그의 이상의 좌절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러스킨의 삶과 사랑을 보며 근대 길목의 영국 사회가 겪었던 심한 열병의 한 단면을 본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