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초 대만 타이베이. 현지의 한 전자업체 사무실에서 전자부품 검사장비에 대한 비교 테스트가 열리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장비 중 어떤 것을 구매할지 시험하는 중이었다.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사장(당시 47세)은 연신 물을 들이켰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제품을 외국 기업에 처음 평가받는 순간이었다. 짧은 순간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2002년 서울 시청 부근에서 친구의 사무실 책상 두 개를 빌려 사업을 시작하던 일.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제품을 개발하자’ ‘기술력으로 승부하자’ ‘해외 시장을 겨냥하자’고 의기투합하던 일. 여기저기서 자금을 어렵게 구해 연구한 끝에 제품을 완성하고 뛸 듯이 기뻐했던 일 등등.

고 사장에게는 대만에서의 승부가 세계시장 진출을 가늠하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전자 분야에 강한 대만은 무척 중요한 시장이었다. 마침내 테스트 결과가 발표됐다. 승리였다. 고 사장과 직원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기술력과 성능 면에서 모두 미국 제품을 앞질렀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최종 계약은 미국 업체에 돌아갔다. 고영테크놀러지가 신생업체여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한국 내 몇몇 대기업에 대한 납품실적도 이런 결과를 뒤집지 못했다.

고 사장은 눈물을 삼켰다. 프레젠테이션에 이어 장비를 싣고 타이베이까지 와서 어렵사리 기술력 테스트에서 이겼는데 최종 계약에서는 고배를 마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장비를 다시 한국으로 갖고 가면서 그는 선진국에서 정면 승부를 벌이기로 했다.

그는 그해 중반 장비를 싣고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서 각각 시연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벤처기업이라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지 기업은 엄격하게 성능을 시험하고 꼼꼼하게 스펙을 따진 뒤 고영테크놀러지의 손을 들어줬다. 다름 아닌 글로벌 전자업체인 지멘스였다. 당시 150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190여개국에 활동하던 지멘스가 창업한 지 2년 된 한국 중소기업 제품을 산 것이다. 비로소 수출 문이 트였다.

그 다음은 미국이었다. 이곳에서도 기술력은 통했다. 세계적인 반도체업체 등으로부터 주문을 받았다. 그동안의 자금난과 조바심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었다.

고영테크놀러지는 수출을 시작한 지 10년도 안 돼 ‘3D 전자부품 검사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대 업체로 올라섰다. 2011년 무역의 날에 ‘5000만불 수출탑’을 받았다. 고 사장은 “2012년 수출액은 7000만달러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매출도 뜀박질하고 있다. 2009년 269억원에서 2010년 712억원, 2011년 802억원으로 증가했다. 고 사장은 “2012년 매출은 약 1000억원에 달했다”고 밝혔다. 3년 새 거의 4배로 커진 것이다.

고영테크놀러지 제품은 현재 47개국 900여개 기업에 수출되고 있다. 내수 비중은 19%에 불과하다. 수출국은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유럽과 미국 캐나다를 비롯해 멕시코 브라질 등 중남미, 동남아 등이다. 고객 중에는 독일의 세계적 자동차 전장업체인 콘티넨탈오토모티브와 일본 캐논그룹 등이 들어 있다. 몇몇 업체는 이 회사 장비를 자사 생산라인의 표준장비로 결정한 상태다. 이 회사 제품은 독일 제품에 비해 20~30% 비싸다.

성장 비결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두 걸음 앞서가는’ 기술력이다. 이 회사가 만드는 제품은 ‘표면실장기술(SMT·Surface Mount Technology)’ 공정과 반도체 후공정에서 납의 면적, 부피, 형상 등을 측정해 사용자에게 전해주는 장비다. 전자부품 생산의 첫 단계에서 불량 여부를 관리해 수율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고 사장은 “그 전에는 이를 2차원으로 검사했는데 우리가 3차원 장비를 개발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주에서 태어난 고 사장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미국 피츠버그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로보틱스다. 미래산업 연구소장으로 일하다가 2002년 창업했다.

그는 남들이 어렵다고 말하는 분야에 도전해 이를 해내는 게 주특기다. 미래산업 시절엔 뛰어난 성능의 표면실장장비를 개발해 글로벌 전자업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창업 후에는 남들이 2차원 검사장비에 매달려 있을 때 이보다 10배 이상 어려운 ‘3차원 프린팅 후 검사장비’를 개발해 주위를 긴장시켰다. “당시 미국의 한 반도체업체가 고영이라는 한국의 이름없는 중소기업이 3차원 검사장비를 개발하자 거래처인 독일과 일본 업체에 이 장비의 제품화를 의뢰했는데 결국 해당 회사들이 손을 들고 포기한 일도 있다”고 고 사장은 회고했다.

이 회사의 서울 가산동 본사에는 전체 직원 250명의 80%인 200명이 일한다. 이 중 100명이 연구·개발 인력이다. 평균 연령이 30대 중반인 젊은이들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중반 3차원 ‘마운팅(mounting) 후 검사장비’와 ‘리플로(reflow) 후 검사장비’도 개발했다. 고 사장은 “4년 반 걸려 개발한 장비로 외국 업체에 비해 4년 이상 앞선 기술”이라고 밝혔다. 이들 장비와 관련, 국내외에 30건 이상의 특허를 등록했고 130건 이상을 출원했다.

‘수출의 다리’ 옆 가산디지털밸리에 있는 이 회사에는 해마다 수십명의 바이어가 찾아와 상담을 벌인다. 해외 전시회에 출품하지만 상담은 해외 바이어들이 회사로 찾아와 이뤄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게 고 사장의 설명이다.

고 사장은 의료용 로봇도 개발 중이다. 차세대 먹거리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그는 “자금력으로 무장한 글로벌 기업들과 같은 분야에서 같은 기종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며 “아예 이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멀찌감치 앞서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출퇴근 시간 자유…일과중 일주일에 2시간 반드시 헬스클럽 가야

고영테크놀러지는 세 가지 면에서 특이한 회사다. 우선 직원들의 출퇴근이 자유롭다. 늦게 나와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다.

둘째, 헬스클럽은 반드시 이용해야 한다. 1주일에 두 시간은 일과 중 사내 헬스클럽에 가야 한다. 의무사항이다. 이 회사의 이보라 과장(35)은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운동을 한다. 오후 4시부터 한 시간씩 한다. 고광일 사장은 직원 출퇴근은 점검하지 않아도 운동 결과는 꼭 살핀다. 그는 “앉아서 일만 하면 배가 나오고 건강이 나빠져 일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셋째, 대기업에서 온 사람들이 10여명에 이른다. 삼성 LG 동부 등에서 이직한 것이다. 남들은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옮기지 못해 안달하는데 이들은 자발적으로 이곳에 왔다. 이 회사 연봉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못지않다. 2012년에는 정해진 연봉 외에 350%의 특별 보너스를 지급했다.

고 사장은 “회사가 지속 성장하려면 먼저 직원들이 건강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자율성을 최대한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