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안 해머 씨는 미국 워싱턴의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법률자문관실에서 일하던 중견 공무원이다. 며칠 전 코빙턴앤드벌링이라는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지난 몇 년간 CFTC에서 한 업무는 미국의 새 금융규제법안인 도드-프랭크법 중 파생상품 관련 규제의 세부내용을 입안하는 일. 새 직장에서는 자신이 만든 규제를 받게 될 금융회사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면 규제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지’ 자문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새 규제 시행은 (공무원에게) 민간에서 무언가를 도모할 기회”라고 말했다.

지난 6월부터 현재까지 해머 씨를 포함해 최소 9명의 CFTC 출신 공무원이 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펌은 물론 JP모건체이스, 도이치뱅크, 노무라증권 등 대형 금융회사,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를 포함한 회계법인들이 CFTC 출신 공무원들을 영입하고 있다.

파생상품인 스와프 거래에 대한 규제가 내년부터 시행되기에 앞서 규제를 직접 만든 공무원들을 앞다퉈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규제당국과 시장 간의 이른바 ‘회전문 인사’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규제 시스템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대규모 자리 이동이 뒤따랐다. 과거에는 주로 증권거래위원회(SEC)나 미국 중앙은행(Fed) 출신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금융위기 이후에는 CFTC 출신들에게도 민간에서 훨씬 많은 돈을 벌 기회가 생겼다. 금융위기 주범으로 지목되는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가 강화돼 CFTC의 힘이 세진 결과다.

금융사 입장에선 강화된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전직 공무원을 고용하는 게 유리하다. 자리를 옮긴 ‘전관’들은 정부에 남아 있는 옛 동료들과의 ‘커넥션’을 활용해 회사의 이익에 맞도록 규제를 바꾸는 로비를 벌인다. 그러나 규제당국-시장 커넥션은 그 비용이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

한국에선 금융감독원에서 금융소비자 보호 기능을 떼어내 금융소비자보호원을 신설하는 방안을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금융감독원 출신들은 이미 은행 감사 자리를 꿰차고 있다. 별도의 보호원이 생긴다면 한국판 해머 씨도 수두룩하게 배출될 것 같다. 규제 강화가 낳는 ‘검은 일자리’는 달갑지가 않다.

유창재 뉴욕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