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다방 사장님, 모터사이클용 의류로 13개국 시장서 '질주'
충북 영동의 낙랑다방. 동네 아저씨들로 북적대는 시골 다방에 한 고등학생이 들어섰다. 한 아저씨가 소리쳤다. “어이~학생. 이런 곳에 들어오면 안돼.” 하지만 그 학생은 씩 웃을 따름이었다. 그가 바로 이 다방의 사장이었기 때문이다.

1958년 당시 17세였던 박은용은 낮에는 학생, 저녁에는 여종업원 5명을 둔 다방 사장이었다. 그로부터 50여년 후. 다방 주인이었던 학생은 열여덟 가지 직업을 거쳐 마침내 모터사이클용 고급 가죽의류 시장에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한일의 박 회장(71)이다.

박 회장은 “모터사이클 레이서용 가죽의류 중 고급제품 분야에선 세계 시장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간 수출액은 약 2000만달러. 글로벌 경기 침체로 세계 시장 규모가 줄어들면서 수출액도 전성기 때의 3500만달러에 비해 40% 이상 감소했지만 여전히 아성을 지키고 있다.

고등학생 다방 사장님, 모터사이클용 의류로 13개국 시장서 '질주'
박 회장은 “주문은 있지만 부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 바이어 신용도를 따져 선별 수주하기 때문에 수출 물량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수출 지역은 13개국이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이 약 80%, 일본 등 나머지 지역이 20%를 차지한다. 생산제품은 거의 전량 수출한다.

익스트림스포츠인 모터사이클 레이싱의 속도는 약 300㎞에 이른다. 이 속도는 번개처럼 질주하는 KTX의 주행속도이고 보잉항공기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속도다. 고속으로 달리다 보니 부상 위험도 크다. 박 회장은 “안전한 질주를 위해선 조종기술과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특수 가죽의류”라고 밝혔다.

이 옷은 전투기 조종사 옷처럼 상의와 하의가 통짜로 돼 있다. 등과 엉덩이, 어깨 팔꿈치 무릎에는 특수보호대가 설치돼 있다. 이들이 레이서가 넘어지거나 충돌할 때 몸을 보호한다. 팔 어깨 몸통 허리 허벅지 다리 부분이 정교하게 디자인돼 있어 일반 의류와는 다르다. 소비자 가격은 디자인과 가죽 종류 등에 따라 천차만별. 한 벌에 수백달러에서 수천달러에 이른다. 박 회장이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험난한 여정이 있었다.

박 회장이 처음부터 가죽의류 사업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업가 기질이 있었다. 고교 재학 중 용돈을 모아 지인과 함께 충북 영동에 다방을 열었고 돈도 제법 벌었다. 부친이 한약방, 모친은 사업을 해서 집안도 풍족했다.

그는 “경북대 사범대학에 응시하러 갔다가 대구 칠성시장 골목의 가게들이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고 그 길로 그곳에 가게를 얻었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되기보다는 사장님이 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대구에서 사이다 대리점 운영, 연탄 판매, 밀가루 유통 등을 시작했다. 하지만 군에서 제대하고 나오니 지인에게 맡겼던 사업은 쫄딱 망해 있었다. 이때부터 그의 험난한 인생역정이 시작됐다. 남들에게 손 벌리는 것을 싫어하고 자존심도 강했던 그는 지인이 거의 없는 대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재래시장에서 상품 포장을 시작했다. 이어 의류제작 산소용접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한 끝에 칠판업체인 애국흑판에 입사했다. 그러다 33세의 나이(1974년)에 한일을

창업했다. 일본 혼다 등 유명 모터사이클 업체에 경기복을 수출하는 사업이었다. 대전피혁을 통한 간접수출 방식이었다.

그는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네 가지로 꼽았다. 첫째가 성실성과 신뢰다. 박 회장은 “창업 후 10년 동안은 직원들 월급 주기도 힘들어 밖에서 다른 일을 병행하며 월급을 댔다”고 말했다.

10년쯤 지나자 기회가 찾아왔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 업체와 직거래를 시작하면서 성장의 발판이 마련됐다. 거래처인 혼다는 박 회장의 성실성을 신뢰하고 혼다 본사가 있는 도쿄 부근의 기업뿐 아니라 오사카 하마마쓰 등 멀리 떨어진 기업들까지 소개시켜 줬다. 이들 기업의 간부와 신뢰를 맺자 어떤 일본업체 임원은 박 회장에게 자녀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다방 사장님, 모터사이클용 의류로 13개국 시장서 '질주'
그는 바이어들과도 15~20년 정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박 회장은 “바이어들과 오랫동안 거래할 수 있었던 것은 바이어가 요구하는 품질 납기 디자인을 잘 맞춰주며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숙련된 가공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 이 회사에는 장기 근속자가 많다. 김팔수 공장장(66) 등 네 명은 창업할 때 입사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20년 넘게 근속한 사람도 열 명에 이른다. 박 회장은 “가죽의류 가공은 숙련기술이 필요한 만큼 장기 근속자가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디자인 능력이다. 한일은 자체 디자인연구소를 통해 연간 1000여종의 신제품을 선보인다. 모터사이클용 가죽의류는 다품종 소량생산 제품이고 프로선수용의 경우 맞춤형으로 제작된다. 다양한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다. 이 회사는 가볍고 세련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박 회장은 “기술과 디자인이 앞서면 봉제산업도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생산능력이 뒷받침되고 있다. 이 회사는 1994년 중국 산둥성 웨이팡에, 지난해엔 베트남 타이빈에 공장을 설립했다. 이들 해외 공장에서는 1000여명의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박 회장은 “중국의 경우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는 데다 사람 구하기도 힘들어 생산시설을 점차 베트남으로 이전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의 꿈은 최대시장인 미국 진출을 본격화해 유럽·일본·미국 등 3대 시장에서 질주하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베트남 공장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칠순 기업인의 도전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관심이다.

인생은 도전의 연속…칠순에 베트남어도 공부

박은용 회장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다. 그가 열여덟 가지 직업을 경험한 것도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는 긍정적인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 가슴이 설렌다”며 “혹시라도 어려움이 닥치면 반드시 헤어날 구멍이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가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 대지 2만3100㎡(7000평), 건평 1만3200㎡(4000평) 규모의 공장을 지은 것도 도전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외국어에 대한 도전도 마찬가지다. 그가 처음에 일본 시장을 개척할 때 일본어를 못해 손짓 발짓으로 소통했다. 박 회장은 “처음 일본에 갔을 땐 ‘스미마센’과 ‘이쿠라데스카’밖에 할 줄 몰라 식당에 가서 돼지고기 요리를 시킬 땐 코를 들어 올리고 돼지 울음 소리를 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새벽에 학원에 다니며 일본어를 익혀 지금은 일본 바이어들과 상담은 물론 농담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중국 진출 후에는 중국어도 익혔다.

베트남 공장을 건설하면서 베트남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중국어는 4성까지 있지만 베트남어의 성조는 더 복잡해 쉽지 않다”며 “하지만 비즈니스에 필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까지 공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전=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