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수사 축소ㆍ은폐 의심돼..인종증오금지법도 유명무실

지난 9월 말 호주 멜버른의 한 공원에서 한국인 유학생 장모(33) 씨가 백인 10대 10여명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장 씨는 가해자들이 인종차별적 욕설과 함께 휘두른 흉기에 새끼손가락이 잘리고 왼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이 사건은 한 달이 넘도록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조용히 묻힐 뻔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1월 돼서였다.

경찰의 부실수사에 대한 문제점과 억울함을 호소한 장 씨의 글이 자신의 블로그와 일부 포털사이트 게시판 등에 게재됐고 이를 연합뉴스가 단독 보도하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특히 가해자들이 '망할 놈의 중국인(Fucking Chinese)' 등의 인종차별적 욕설을 퍼부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태의 심각성이 더해졌고 현지 경찰의 축소수사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파장이 커졌다.

피해자 장 씨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이 사건이 인종차별적 동기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경찰은 이 같은 의견을 묵살했고 가해자 10여명 중 1명만을 강도상해 및 폭행 등의 혐의를 적용해 기소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지었다.

특히 호주 경찰은 '당신이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며 사건 발생의 책임을 피해자인 장 씨에게 떠넘기는 듯한 발언까지 해 물의를 빚었다.

장 씨 사건이 한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호주 주재 한국 공관이 호주 당국에 경찰 수사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빅토리아주 경찰은 재조사를 약속했으나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태다.

장 씨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시드니에서 한국인 회사원이 무차별 폭행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시드니의 한 헤드헌팅 회사에 다니는 한국인 김모(33) 씨가 10월13일 새벽 4시30분께 귀가하던 중 자신의 집 근처 주택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 4~5명에게 골프채 등으로 집단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 씨는 두개골에 금이 가고 갈비뼈 2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사건 발생 장소가 중국인 등 아시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란 점으로 미뤄 아시아인을 겨냥한 인종증오 범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시드니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 반쯤 지났을 즈음 이번에는 브리즈번에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11월25일 0시30분께 브리즈번 런콘 지역에서 한국인 워킹홀리데이 비자소지자 조모(28) 씨가 집 근처에서 통화하던 중 백인 청년 2명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이 지역 역시 아시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특정 인종을 겨냥한 인종증오 범죄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조 씨는 진술했다.

이 사건은 특히 현지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위험한데) 왜 밤늦게 돌아다니느냐"고 핀잔을 주는가 하면 "위험한데 밤늦게 돌아다니는 아시아인들이 멍청하고(stupid), 어리석다(silly)"는 발언까지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문이 확대됐다.

일련의 세 사건 중 두 사건이 인종증오 범죄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한 사건은 인종증오 범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현지 경찰은 처음부터 인종증오 범죄가 아니라고 예단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논란을 빚고 있다.

멜버른 피해자 장 씨는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듯한 발언을 하는 등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호주 정부는 1995년 특정 인종이나 출신 국가를 비하하는 내용의 욕설이나 비방 등을 범법으로 규정한 '인종증오금지법(Racial Hatred Act)'을 제정했지만 경찰이 실제로 이 법을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법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실정이다.

호주 정부와 경찰의 이 같은 태도는 자칫 호주가 인종차별이 만연한 나라라는 인상을 줄 경우 자국 경제를 떠받치는 양대 산업인 유학과 관광산업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호주 주요 도시에서 잇따라 발생한 한국인 무차별 폭행 사건이 이슈화되자 호주 내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는 "실은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집 앞 슈퍼마켓에 가는 길에 백인 남성으로부터 이유없이 '망할 놈의 중국인' 등의 인종차별적 욕설을 받았다는 증언에서부터 길 가던 백인 남성이 인종차별 욕설과 함께 침을 뱉었다는 사례 등이 무수히 제시됐다.

호주에 3년간 근무한 한 한국 대기업 주재원은 "중학생인 우리 애들도 학교 매점에서 호주 아이들이 먹다 남은 빵봉지같은 걸 집어던지면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시비를 걸었다고 하더라"며 "문제를 쉬쉬하려고만 해서는 아무런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호주는 오랫동안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던 백호주의(白濠主義:백인 우선정책)를 1973년 공식 폐기했지만 100년 넘게 이어져온 인종차별 정서가 하루아침에 없어졌다곤 말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호주 정부는 더이상 자국이 인종차별 국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호주에 거주하는 수많은 아시아계 이민자, 유학생, 주재원,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비자들이 느끼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시드니대 유학생인 김형태(22ㆍ가명) 씨는 "최근 알려진 일련의 사건은 그나마 피해가 심각하고 보도가 됐기에 공론화된 것이지 상대적으로 정도가 경미해 알려지지도 않은 사례는 얼마나 많겠느냐"며 "빙산의 일각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시드니연합뉴스) 정 열 특파원 passi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