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회 "형평성ㆍ구체성↓"…市 "취지 무색" 반발
전문가들 "태생적 모순…자리잡는 데 시간 소요"

서울시가 올해 처음 도입한 주민참여예산제를 통해 채택한 사업 상당수의 내년 예산이 시의회에서 전액 삭감돼 논란이 되고 있다.

시의회는 사업 중복과 자치구 간 형평성 등을 고려해 예산안을 예결위원회에 올리기 전 상임위원회에서 걸러낸다는 입장이지만 시는 주민참여예산제의 취지가 무색해졌다며 반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예산심의권이 의회의 고유권한임을 감안할 때 주민참여예산제도가 '대의제'와 '시민의 직접 참여' 사이에서 태생적 모순을 갖고 있어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보고 있다.

◇여성가족ㆍ문화사업 무더기 폐기 전망 = 28일 서울시와 시의회에 따르면 지난 26일 시의회 일부 상임위는 주민참여예산제로 선정된 사업예산을 대부분 삭감했다.

특히 여성가족정책실, 문화디자인관광본부 소관 사업이 대표적이다.

여성가족분야 사업 중에서는 한부모가정 이해교육강사 양성교육(5천800만원), 청소년 전용클럽 힐링캠프 운영(11억원), 청소년누리터 조성(5억원), 토요마을학교 운영(5억원), 다문화가족 서울속 궁궐 나들이(1천2백만원) 등의 예산이 전액 삭감됐다.

문화분야에서는 4ㆍ19문화제 지원(2억9천만원), 지붕없는 동네미술관 마을 조성(3천500만원), 리폼 바느질 공방 지원(4천200만원) 등의 예산이 모두 깎였다.

아직 예결위 심의가 남아있지만 시의회측에서는 "예결위에서도 상임위 논의 사안을 존중하는만큼 이번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경제진흥실과 복지건강실 관련 예산안은 이날 해당 상임위 심의를 앞두고 있다.

◇市 "주민 의견 존중해야" vs. 시의회 "타당성 엄격히 심사해야" = 주민참여예산 사업이 상당수 백지화된 데 대해 시에서는 불만을 표시했다.

시 관계자는 "이 사업들은 주민 250명이 위원으로 참여해 3개월여에 걸쳐 투표로 선정한 사업들"이라며 "특정지역에 편성됐다고 삭감한 건 지역환경에 맞게 주민이 사업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주민참여예산제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시 관계자는 "주민참여예산제도 자체가 시의원의 발의로 제정된 조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데, 시의회에서 사업을 반려하는 것은 모순적인 태도"라고 지적했다.

시의회측은 예산 심의가 의회의 고유권한이며, 주민참여예산제를 통해 올라온 사업들 자체가 지역간 형평성을 저해하고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한 시의원은 "예상 지출내역이나 타당성, 효과성에 대한 구체적 계획 없이 사업명과 예산만 올린다고 통과시킬 수 없다"며 "담당공무원에게 사업 세부계획을 물으면 집행부가 직접 추진하는 사업과 달리 제대로 설명을 못한다.

형식적으로 추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시의원은 "주민참여예산안으로 올라온 사업이라고 의회에서 모두 동의만 해준다면 의회는 거수기일뿐"이라며 "10만명의 대표인 의원도 1명당 겨우 2억~3억원씩 사업을 예산안에 올리는데 `주민참여'란 이유만으로 수십억짜리 사업이 쑥쑥 들어와도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전문가들 "태생적 장점과 한계…정착에 시간 소요" = 전문가들은 주민참여예산제가 태생적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갖고 있는데다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제 간 모순 때문에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풀이했다.

김순은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주민참여예산제는 주민이 토론을 거쳐 스스로 필요한 사업을 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그 사업의 타당성을 심의하는 것도 의회의 제도적인 고유 권한일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필요한 사업과 우선순위를 정하는 건 주민 몫이지만 사업의 타당성, 계획성을 갖춰 의회를 설득하는 것은 집행부의 몫이며 그게 정치"라고 덧붙였다.

김수현 세종대 교수는 "주민참여예산제는 소액이지만 시민이 예산 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지역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동시에 대의제인 의회 권력과 모순되는 측면도 있다"며 "시행 첫 해인만큼 장점과 한계를 조정해 가는 과도기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이슬기 기자 lisa@yna.co.krwis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