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대한제국, 독립인가 중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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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선이 올린 '석고송병서'
대한제국 황제는 '정통천자'
東亞 문명의 중흥으로 여겨
대한제국 황제는 '정통천자'
東亞 문명의 중흥으로 여겨
우리나라 역사상 ‘해동성국’이란 영예를 얻은 나라의 이름은 무엇일까. 대조영이 세운 발해이며, 그 주인공은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후손인 발해 10대 임금 선왕(宣王)이다.
그는 발해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발해를 다시 강국으로 중흥시킨 인물이다. 창업의 제왕이 아닌 중흥의 제왕에게 ‘성국(盛國)’의 칭호가 돌아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왕호부터 중국 주(周)나라를 중흥시킨 선왕(宣王)과 같은데 발해 사람들이 그를 사후에 중흥의 제왕으로 인식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 임금 중 생전에 자신의 왕업을 주 선왕의 중흥에 비견한 인물이 있다. 신기선(申箕善·1851~1909)의 《양원유집(陽園遺集)》권10 중 ‘석고송병서(石鼓頌幷序)’를 읽어보자.
‘우리 임금님께서 등극하신 지 34년째 되는 정유년(1897)은 개국 506년이다. 국운이 중흥을 만나 국보(國步)가 융성해졌다. 천관과 육군과 만민이 일제히 청하기를 황제의 대위에 올라 명나라의 이미 끊어진 정통을 이어 조종(祖宗)의 마치지 못한 뜻을 이룩하시라 했다. (…) 임금님께서는 거듭 사양하다 마지못해 9월16일 원구단에 하늘과 땅을 합해 제사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원구단을 세우는 역사를 마친 다음에 온 나라의 신사(紳士)들이 장차 돌에 새겨 사적을 기록하려 하니 임금님께서 거듭 타일러 그만두게 했다. 그러자 신사들이 서로 함께 의논했다. “송가(頌歌)를 지으려는 생각이 뭉게뭉게 마음에서 피어나니 어찌 임금님의 겸손한 마음 때문에 끝내 그칠 수 있으랴. 주나라에 석고(石鼓)가 있음은 대개 사냥하러 갔다가 선왕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니 비록 오늘날에 빗대기는 부족하지만 애오라지 이를 고사(故事)로 원용할 수는 있으리라.” 이에 돌을 벌채해 석고를 만들고 신에게 글을 짓기를 부탁하니 신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며 송(頌)을 바친다.’
나라가 흥하려면 도읍을 옮겨야 하는가.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천도를 통해 만들어진 새 나라였다. 태조는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했지만 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으로 옮겨 갔다. 한양이 새 왕조의 터전이 된 후 다시 천도는 없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정은 달라졌다. 안팎의 위기로부터 왕국을 구원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이 제고되면서 왕국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는 게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제2의 건국을 위한 천도 아닌 천도가 추구됐다. 경복궁을 중건한 뒤 이뤄진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의 ‘미니 천도’였다.
하지만 건국보다 중요한 것은 중흥이었다. 이에 다시금 왕국의 중흥을 위한 새로운 ‘미니 천도’가 단행됐다. 경복궁을 나온 고종은 경운궁(慶運宮)에 들어갔다. 그가 경복궁을 나온 것은 명성황후를 일본에 잃은 뒤 감행한 불가피한 탈출이었지만 그가 경운궁에 들어간 것은 제국의 새 아침을 열기 위한 중흥의 결단이었다.
고종 이전에도 조선의 많은 임금이 중흥을 자처했지만 고종의 중흥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신기선이 고종에게 ‘석고송’을 헌정한 것은 조선 말 대한 초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오는 암흑의 터널에서 만난 온갖 조선의 ‘음(陰)’과 조선의 ‘왕망(王莽)’을 이겨내고 고종이 중흥을 성취했음을 찬양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석고송’에서 말하는 고종의 중흥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송·명을 끝으로 화운이 다해 천하의 도가 동으로 넘어와, 이제는 화하(華夏)의 문물을 우리 황제가 보존하고 예악과 정벌을 우리 황제가 내고 있으니, 우리 황제가 바로 ‘정통천자(正統天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독립’의 키워드로만 독해하는 시각은 불완전하다. 조선후기 지성사의 맥락에서 ‘중흥’의 키워드로도 읽어야 한다.
노관범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발해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발해를 다시 강국으로 중흥시킨 인물이다. 창업의 제왕이 아닌 중흥의 제왕에게 ‘성국(盛國)’의 칭호가 돌아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왕호부터 중국 주(周)나라를 중흥시킨 선왕(宣王)과 같은데 발해 사람들이 그를 사후에 중흥의 제왕으로 인식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 임금 중 생전에 자신의 왕업을 주 선왕의 중흥에 비견한 인물이 있다. 신기선(申箕善·1851~1909)의 《양원유집(陽園遺集)》권10 중 ‘석고송병서(石鼓頌幷序)’를 읽어보자.
‘우리 임금님께서 등극하신 지 34년째 되는 정유년(1897)은 개국 506년이다. 국운이 중흥을 만나 국보(國步)가 융성해졌다. 천관과 육군과 만민이 일제히 청하기를 황제의 대위에 올라 명나라의 이미 끊어진 정통을 이어 조종(祖宗)의 마치지 못한 뜻을 이룩하시라 했다. (…) 임금님께서는 거듭 사양하다 마지못해 9월16일 원구단에 하늘과 땅을 합해 제사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원구단을 세우는 역사를 마친 다음에 온 나라의 신사(紳士)들이 장차 돌에 새겨 사적을 기록하려 하니 임금님께서 거듭 타일러 그만두게 했다. 그러자 신사들이 서로 함께 의논했다. “송가(頌歌)를 지으려는 생각이 뭉게뭉게 마음에서 피어나니 어찌 임금님의 겸손한 마음 때문에 끝내 그칠 수 있으랴. 주나라에 석고(石鼓)가 있음은 대개 사냥하러 갔다가 선왕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니 비록 오늘날에 빗대기는 부족하지만 애오라지 이를 고사(故事)로 원용할 수는 있으리라.” 이에 돌을 벌채해 석고를 만들고 신에게 글을 짓기를 부탁하니 신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며 송(頌)을 바친다.’
나라가 흥하려면 도읍을 옮겨야 하는가.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천도를 통해 만들어진 새 나라였다. 태조는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했지만 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으로 옮겨 갔다. 한양이 새 왕조의 터전이 된 후 다시 천도는 없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정은 달라졌다. 안팎의 위기로부터 왕국을 구원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이 제고되면서 왕국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는 게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제2의 건국을 위한 천도 아닌 천도가 추구됐다. 경복궁을 중건한 뒤 이뤄진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의 ‘미니 천도’였다.
하지만 건국보다 중요한 것은 중흥이었다. 이에 다시금 왕국의 중흥을 위한 새로운 ‘미니 천도’가 단행됐다. 경복궁을 나온 고종은 경운궁(慶運宮)에 들어갔다. 그가 경복궁을 나온 것은 명성황후를 일본에 잃은 뒤 감행한 불가피한 탈출이었지만 그가 경운궁에 들어간 것은 제국의 새 아침을 열기 위한 중흥의 결단이었다.
고종 이전에도 조선의 많은 임금이 중흥을 자처했지만 고종의 중흥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신기선이 고종에게 ‘석고송’을 헌정한 것은 조선 말 대한 초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오는 암흑의 터널에서 만난 온갖 조선의 ‘음(陰)’과 조선의 ‘왕망(王莽)’을 이겨내고 고종이 중흥을 성취했음을 찬양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석고송’에서 말하는 고종의 중흥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송·명을 끝으로 화운이 다해 천하의 도가 동으로 넘어와, 이제는 화하(華夏)의 문물을 우리 황제가 보존하고 예악과 정벌을 우리 황제가 내고 있으니, 우리 황제가 바로 ‘정통천자(正統天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독립’의 키워드로만 독해하는 시각은 불완전하다. 조선후기 지성사의 맥락에서 ‘중흥’의 키워드로도 읽어야 한다.
노관범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