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는 17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일본에 파견된 사신이자 문화사절단이었다. 이들 조선통신사와 일본인의 교류는 그림에서 시작해 시문창화(詩文唱和)로 이어졌다. 보통의 일본인도 조선 사신이 쓴 글씨라면 내용을 불문하고 갖고 싶어했다. 항간에는 조선인의 글씨나 그림을 지니면 액운이 달아난다는 말도 떠돌았다. 문사들이 읊은 시는 다시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일본어 책으로 간행됐다.

《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은 조선통신사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통신사는 무엇을 타고 어떻게 일본으로 갔는지, 어디서 어떻게 잠을 자고 무엇을 먹었는지, 생일과 명절에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시를 읊었는지 등에 주목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조선에 사행(使行)을 요청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이 임진왜란을 복수하기 위해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조선과의 관계 회복이 절실했다. 조선에서 사행을 파견한 이유도 정치적이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같은 전란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일본의 동태를 살피고, 일본에 끌려간 수많은 포로를 쇄환할 목적이었다.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멸시했던 조선 사대부들은 사신으로 뽑히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고생길을 겪으며 점차 일본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게 됐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열두 번의 사행이 있었고, 평균 470명이 1년 단위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양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한 후 배를 타고 일본 쓰시마로부터 아카마가세키(지금의 시모노세키)까지 각 지역을 지나 오사카에 상륙, 육로를 통해 교토와 나고야를 거쳐 에도에 이르렀다. 여기서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식을 치르고 여정을 되짚어 귀국했다. 부산에서 에도까지 뱃길 3190리, 강물120리, 육로 1330리에 이르니 왕복으로 치면 1만리길을 9~11개월에 걸쳐 다녀온 고달픈 여정이었다.

쓰시마에서 에도에 이르기까지 통신사행은 60곳 이상의 관소에 머물렀다. 400~500명의 인원이 지역을 옮겨갈 때마다 짐을 풀고 방을 배정받았기 때문에 배 안과 관소에서 방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방을 쓰고 싶어서 먼저 도착한 사람의 하인이 방 앞에 있는 이름 팻말을 바꿔치기 하는가 하면, 더 편한 가마와 말을 타려고 신경전이 일기도 했다. 타고 있던 배에 원인 모를 불이 나 배 안에서 악공과 사령이 타죽는 참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국에서 맞는 생일과 명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도 공개한다. 전쟁을 일으킨 적의 나라에서 생일을 맞는 우울함, 단오 칠석 중양절 동지 등 명절을 보내면서 일본인들과 더 깊이 교류하게 된 글귀와 그림, 시화 등을 소개한다. 조선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의 명절 풍습과 음식, 여인들에 대한 기록도 담았다. 저자는 “사행 초기에는 전쟁 재발 방지와 포로 쇄환이 목적이었지만 점차 ‘문화적 교양’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며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의 문화에 대한 열망이 컸고, 일본 백성들은 조선의 문물에 광적으로 흥분했다”고 설명한다. 또 “조선통신사들이 사행선을 타고 부산항을 떠난 그 순간부터 겪었던 기쁨과 설렘, 고난과 통한, 낯선 문명으로 인한 충격과 환희 등 그 모든 여정에 존경을 표한다”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