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인물탐구 - 김철호 본아이에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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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개도 못 팔던 길거리 호떡 장수
제대로 '죽' 쑤어 장수 브랜드 일구다
포목점 하던 홀어머니 대신 문상 다니던 '애늙은이'
외환위기로 부도 맞아 요리학원 다니며 외식업 도전
길거리 음식에 브랜드 붙여 숙대 명물 된 '꿀떡깨비 호떡'
웰빙 열풍으로 '본죽' 대박…상생 위한 로열티 제도 도입
제대로 '죽' 쑤어 장수 브랜드 일구다
포목점 하던 홀어머니 대신 문상 다니던 '애늙은이'
외환위기로 부도 맞아 요리학원 다니며 외식업 도전
길거리 음식에 브랜드 붙여 숙대 명물 된 '꿀떡깨비 호떡'
웰빙 열풍으로 '본죽' 대박…상생 위한 로열티 제도 도입
수십 번을 망설였다. 36세 청년은 리어카를 끌고 나서다가 돌아오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다. 50m 정도 이동하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난생 처음 해보는 호떡 장사 첫날이었다. 창피함과 모멸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루 종일 판 게 10개를 넘지 않았다. 호떡 노점 ‘꿀떡깨비’는 이렇게 시작됐다. 한 달이 지나자 판매량이 하루 200개를 넘어섰고, 노점 앞에는 긴 줄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 갈월동의 명물이 탄생한 것이다. 숙명여대 학생들 사이에 ‘꿀떡깨비를 모르면 간첩’이란 우스갯소리까지 유행했다.
김철호 본아이에프 회장(49)은 호떡 장사에서 외식업의 모든 것을 터득했다고 잘라 말했다. “대형 음식점이나 노점이나 외식업의 기본은 똑 같다고 봅니다. 일단 청결하고 맛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재료를 써야 하고, 푸짐하게 주는 겁니다. 고객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브랜드도 꼭 필요하죠.”
그는 여느 노점상과 달랐다. 리어카를 개조해 움직이는 매장으로 만들었다. 캐릭터를 그려넣고 브랜드 간판도 달았다. 카세트 테이프를 부착해 온종일 생동감 있는 음악을 틀었다. 일식집 주방장처럼 위생복을 입고 가운도 썼다. 흰 드레스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맸다. 반죽을 누르는 압착기를 여느 호떡집의 1.5배 크기로 만들어 손님들에게 푸짐한 상품을 건넸다. 대박은 거저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1년여의 호떡 장사 경험은 죽 장사를 할 때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어린 시절의 회색빛 기억들
그의 고향은 충남 서천이다. 충남 서남단에 있는 서천은 금강하구여서 산과 강, 바다와 평야를 마음껏 볼 수 있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 그에게 고향은 회색빛이었다.
“제가 9살 때 어머니가 홀로 되셨습니다. 36세 나이로 5남매를 기르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외동아들인 저는 어려서부터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래들처럼 맘껏 뛰놀던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인지 국민학교 때부터 ‘애늙은이’란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포목상을 하셨는데, 가게를 지키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10살부터 부조 봉투를 들고 문상을 다녔으니까요. 포목상은 경조사 다니며 인사하는 게 장사에 절대적이거든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강하고 긍정적인 분이었습니다.”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대전으로 갔다. 서천중학교 때만 해도 공부든, 싸움이든 누구에게 꿀리지 않았지만 대도시 대전에선 달랐다. 공부에 대한 좌절감을 고교 때 처음으로 맛봤다. 특히 책을 많이 읽어 유식한 친구들만 보면 주눅이 들었다.
대학생 김철호는 평범했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무거운 인상의 청년일 따름이었다. 그는 평범함 속에서 두 가지 남다른 경험을 했다. 하나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업하는 맛을 체득한 것이었다.
사업의 씨앗이 뿌려진 것도 대학 캠퍼스 안이었다. 자유로운 생활 속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그 중 가장 짭짤했던 게 책 전집 판매였다. 매일 대학 캠퍼스 안을 헤집고 다니던 한 출판사 영업사원에게 슬쩍 물어봤다. 마진이 얼마나 되느냐고. 판매가의 20%가 수당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한 걸음에 출판사를 찾아갔다. 10%를 받기로 하고 책 판매에 나섰다. 한 학기 등록금 34만원은 금방 벌렸다.
◆넘어지고 일어선 사업 인생
대학 졸업 뒤 일단 직장생활을 하기로 했다. 언젠가 사업을 하더라도 직장생활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1988년 3월 한 신문사 광고국에 입사했다. 만 6년간 열심히 일했다. 광고 영업은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계발이나 재충전 과정없이 끊임없이 경쟁을 독려하는 직장 분위기가 싫었다.
1993년부터 사업에 나섰다. 우연히 알게 된 인삼 제조업자로부터 인삼 농축액을 확보했다. 이 농축액을 당시 히트상품인 위장약 ‘겔포스’처럼 작은 포장에 넣어 팔자는 구상을 떠올렸다. ‘강삼(强蔘) 겔’이란 브랜드를 붙이고 ‘우신HM’이란 이름의 법인도 설립했다. 사업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홍보 마케팅이 잘 안 돼 실적이 저조했다. 대기업에도 납품하면서 근근이 사업을 꾸려 나갔다. 대박은 다른 상품에서 터졌다. 순식물성 천연 세제와 화장품을 수입해 판매했는데, 이게 웰빙 흐름과 맞아떨어져 불티나게 팔렸다. 돈도 제법 모았다. 꿈이 영글어갈 무렵 1997년 12월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꿈은 산산조각 났다.
이듬해 2월까지 가까스로 견디던 김 사장도 드디어 손을 들었다. 2월28일 부도가 났고 6월30일 사적화의를 종결하면서 그는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직원들이 울면서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으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다시는 회사를 망하게 하는 사장이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죠.”
재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막막하기만 했다. 막연하지만 외식업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고차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고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마침 학원 앞에 쓸 만한 공터가 있었다. 여기서 그는 호떡 노점상을 하기로 작정, 원장의 허락을 받았다.
서울시내를 뒤진 끝에 종로 세운상가에서 호떡 장사의 달인을 발견했다. 삼고초려 끝에 반죽 레시피를 배웠고, 이를 응용해 최종 완성품을 만들어냈다. 호떡 혁명을 가져온 ‘꿀떡깨비’였다.
◆‘성공의 죽’을 쑤다
외환위기 이후 명예퇴직 등으로 직장인들은 자영업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평생직장’이 뇌리에 박혀 있던 명퇴자들에게 자영업 시장은 정글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을 컨설팅하는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신규 창업자는 물론이고 부진점포 점주들을 컨설팅하는 일도 했죠. 그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잘되는 음식점과 망하는 음식점의 차이점이 뚜렷이 보이더라고요. 세 가지가 핵심인데요, 잘되는 음식점 사장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음식 그릇이 푸짐하죠. 두 번째는 음식을 상품으로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요. 마지막으로 식재료에 대한 고집이 유난합니다. 좋은 재료만 골라서 쓰거든요.”
컨설팅을 하면서 겪은 한 가지 콤플렉스가 ‘음식점을 경영해 보았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었다. 죽 전문점만 하더라도 컨설팅하는 과정에서 창업자들에게 많이 권유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성공해 보이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대학로상권에 인접한 서울 종로구 연건동 뒷골목 건물 2층 82.5㎡(25평) 매장을 얻어 아내와 함께 장사에 나섰다. 2002년 9월, 당시는 죽 전문점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시기였기에 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서울대학병원으로 가는 길목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열심히 ‘본죽’ 전단지를 돌렸다. 이러기를 3개월, 개점 초기 하루 10그릇 남짓하던 판매량이 100그릇을 돌파했다. 5개월 뒤엔 200그릇을 훌쩍 넘어섰다. 이후 10년간 본죽은 웰빙 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내친 김에 한식을 테마로 한 후속 브랜드도 선보였다. 본 비빔밥(2006년)과 본 대청국수(2008년)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김 회장은 또 한번의 도전에 나서고 있다. 가맹점에 상품을 공급할 때 붙이는 물류마진을 포기하는 대신, 가맹점 매출의 일정 비율을 ‘로열티’로 받겠다는 것이다. 국내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로열티를 받는 곳은 거의 없다. “선진국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핵심은 로열티 제도입니다. 가맹점과 상생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방안입니다. 많이 버는 점포와 부진한 점포의 로열티를 차등화해 가맹점주의 부담을 줄여주자는 취지이지요. 형평성을 고려해 단계별 정률 로열티 제도를 만들었고, 최근 시행에 들어갔지요. 꼭 필요한 일이라 정착할 때까지 밀고 나갈 생각입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
김철호 본아이에프 회장(49)은 호떡 장사에서 외식업의 모든 것을 터득했다고 잘라 말했다. “대형 음식점이나 노점이나 외식업의 기본은 똑 같다고 봅니다. 일단 청결하고 맛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재료를 써야 하고, 푸짐하게 주는 겁니다. 고객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브랜드도 꼭 필요하죠.”
그는 여느 노점상과 달랐다. 리어카를 개조해 움직이는 매장으로 만들었다. 캐릭터를 그려넣고 브랜드 간판도 달았다. 카세트 테이프를 부착해 온종일 생동감 있는 음악을 틀었다. 일식집 주방장처럼 위생복을 입고 가운도 썼다. 흰 드레스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맸다. 반죽을 누르는 압착기를 여느 호떡집의 1.5배 크기로 만들어 손님들에게 푸짐한 상품을 건넸다. 대박은 거저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1년여의 호떡 장사 경험은 죽 장사를 할 때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어린 시절의 회색빛 기억들
그의 고향은 충남 서천이다. 충남 서남단에 있는 서천은 금강하구여서 산과 강, 바다와 평야를 마음껏 볼 수 있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 그에게 고향은 회색빛이었다.
“제가 9살 때 어머니가 홀로 되셨습니다. 36세 나이로 5남매를 기르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외동아들인 저는 어려서부터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래들처럼 맘껏 뛰놀던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인지 국민학교 때부터 ‘애늙은이’란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포목상을 하셨는데, 가게를 지키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10살부터 부조 봉투를 들고 문상을 다녔으니까요. 포목상은 경조사 다니며 인사하는 게 장사에 절대적이거든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강하고 긍정적인 분이었습니다.”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는 대전으로 갔다. 서천중학교 때만 해도 공부든, 싸움이든 누구에게 꿀리지 않았지만 대도시 대전에선 달랐다. 공부에 대한 좌절감을 고교 때 처음으로 맛봤다. 특히 책을 많이 읽어 유식한 친구들만 보면 주눅이 들었다.
대학생 김철호는 평범했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무거운 인상의 청년일 따름이었다. 그는 평범함 속에서 두 가지 남다른 경험을 했다. 하나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업하는 맛을 체득한 것이었다.
사업의 씨앗이 뿌려진 것도 대학 캠퍼스 안이었다. 자유로운 생활 속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그 중 가장 짭짤했던 게 책 전집 판매였다. 매일 대학 캠퍼스 안을 헤집고 다니던 한 출판사 영업사원에게 슬쩍 물어봤다. 마진이 얼마나 되느냐고. 판매가의 20%가 수당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한 걸음에 출판사를 찾아갔다. 10%를 받기로 하고 책 판매에 나섰다. 한 학기 등록금 34만원은 금방 벌렸다.
◆넘어지고 일어선 사업 인생
대학 졸업 뒤 일단 직장생활을 하기로 했다. 언젠가 사업을 하더라도 직장생활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1988년 3월 한 신문사 광고국에 입사했다. 만 6년간 열심히 일했다. 광고 영업은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 계발이나 재충전 과정없이 끊임없이 경쟁을 독려하는 직장 분위기가 싫었다.
1993년부터 사업에 나섰다. 우연히 알게 된 인삼 제조업자로부터 인삼 농축액을 확보했다. 이 농축액을 당시 히트상품인 위장약 ‘겔포스’처럼 작은 포장에 넣어 팔자는 구상을 떠올렸다. ‘강삼(强蔘) 겔’이란 브랜드를 붙이고 ‘우신HM’이란 이름의 법인도 설립했다. 사업은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홍보 마케팅이 잘 안 돼 실적이 저조했다. 대기업에도 납품하면서 근근이 사업을 꾸려 나갔다. 대박은 다른 상품에서 터졌다. 순식물성 천연 세제와 화장품을 수입해 판매했는데, 이게 웰빙 흐름과 맞아떨어져 불티나게 팔렸다. 돈도 제법 모았다. 꿈이 영글어갈 무렵 1997년 12월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꿈은 산산조각 났다.
이듬해 2월까지 가까스로 견디던 김 사장도 드디어 손을 들었다. 2월28일 부도가 났고 6월30일 사적화의를 종결하면서 그는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직원들이 울면서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으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다시는 회사를 망하게 하는 사장이 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죠.”
재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막막하기만 했다. 막연하지만 외식업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고차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고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마침 학원 앞에 쓸 만한 공터가 있었다. 여기서 그는 호떡 노점상을 하기로 작정, 원장의 허락을 받았다.
서울시내를 뒤진 끝에 종로 세운상가에서 호떡 장사의 달인을 발견했다. 삼고초려 끝에 반죽 레시피를 배웠고, 이를 응용해 최종 완성품을 만들어냈다. 호떡 혁명을 가져온 ‘꿀떡깨비’였다.
◆‘성공의 죽’을 쑤다
외환위기 이후 명예퇴직 등으로 직장인들은 자영업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평생직장’이 뇌리에 박혀 있던 명퇴자들에게 자영업 시장은 정글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을 컨설팅하는 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신규 창업자는 물론이고 부진점포 점주들을 컨설팅하는 일도 했죠. 그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잘되는 음식점과 망하는 음식점의 차이점이 뚜렷이 보이더라고요. 세 가지가 핵심인데요, 잘되는 음식점 사장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음식 그릇이 푸짐하죠. 두 번째는 음식을 상품으로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요. 마지막으로 식재료에 대한 고집이 유난합니다. 좋은 재료만 골라서 쓰거든요.”
컨설팅을 하면서 겪은 한 가지 콤플렉스가 ‘음식점을 경영해 보았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었다. 죽 전문점만 하더라도 컨설팅하는 과정에서 창업자들에게 많이 권유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성공해 보이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대학로상권에 인접한 서울 종로구 연건동 뒷골목 건물 2층 82.5㎡(25평) 매장을 얻어 아내와 함께 장사에 나섰다. 2002년 9월, 당시는 죽 전문점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시기였기에 손님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서울대학병원으로 가는 길목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열심히 ‘본죽’ 전단지를 돌렸다. 이러기를 3개월, 개점 초기 하루 10그릇 남짓하던 판매량이 100그릇을 돌파했다. 5개월 뒤엔 200그릇을 훌쩍 넘어섰다. 이후 10년간 본죽은 웰빙 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내친 김에 한식을 테마로 한 후속 브랜드도 선보였다. 본 비빔밥(2006년)과 본 대청국수(2008년)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김 회장은 또 한번의 도전에 나서고 있다. 가맹점에 상품을 공급할 때 붙이는 물류마진을 포기하는 대신, 가맹점 매출의 일정 비율을 ‘로열티’로 받겠다는 것이다. 국내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로열티를 받는 곳은 거의 없다. “선진국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핵심은 로열티 제도입니다. 가맹점과 상생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방안입니다. 많이 버는 점포와 부진한 점포의 로열티를 차등화해 가맹점주의 부담을 줄여주자는 취지이지요. 형평성을 고려해 단계별 정률 로열티 제도를 만들었고, 최근 시행에 들어갔지요. 꼭 필요한 일이라 정착할 때까지 밀고 나갈 생각입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