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이 2조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쌓아둔 채 투자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친(親)기업 정부’가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프레드 버그스텐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소장은 미국 경제 회복이 더디고 기업 투자가 부진한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업 규제가 늘어나고 정책 불확실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

국제경제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꼽히는 버그스텐 소장은 “당면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위기보다 잠복된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문제가 세계 경제에 더 큰 위협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또 공화당의 미트 롬니 후보가 11월6일 대선에서 당선되면 중국 한국 등 미국과의 교역에서 대규모 무역흑자를 내고 있는 나라를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워싱턴DC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봤다.

▷미국 경제 회복에 속도가 붙었나.

“아직 멀었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과잉부채에서 탈출하기 위한 ‘디레버리징(부채 축소)’ 과정에 있다. 가계가 부채를 줄여 소비 능력을 회복하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다. 중앙은행(Fed)이 3차 양적완화 조치를 취했지만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디레버리징 단계에선 통화정책이든 재정정책이든 급격한 경제 회복을 불러오지 못한다.”

▷많은 일자리 창출이 쉽지 않다는 얘기인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미국의 높은 실업률은 ‘환율전쟁’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중국 일본 대만 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 아랍에미리트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산유국들은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와 함께 외환보유액을 늘리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 나라는 환율시장에 개입해 자국 통화가치를 평가절하시켜 수출 경쟁력을 키워왔다. 그 여파로 미국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은 약화됐다. 이들 나라가 미국에 실업을 수출하고 있다고 본다.”

▷미국이 달러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지 않나.

“3차 양적완화는 무역적자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 내 소비 진작과 투자 활성화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봐야 한다. 이머징마켓 등이 환율 개입을 중단하면 미국 무역적자는 연간 1500억~3000억달러 줄어들고, 일자리 100만개 이상이 생길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수출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롬니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중국 등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재정벼랑(fiscal cliff)’ 우려해소가 먼저 아닌가.

“의회가 연내 새로운 예산안에 합의하지 못하면 내년부터 1000억달러 규모의 예산이 자동 삭감된다. 조지 W 부시 전 행정부 때 도입했던 감세 조치도 올해 말 끝난다. 예산 감축에다 세금 인상이 겹치는 재정벼랑이 현실화되면 경제에 큰 충격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미국이 실제로 벼랑으로 굴러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치인(의회)들이 경제를 다시 침체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11월6일 대선 후 전격 타협할 가능성도 있다. 의회가 마음만 먹으면 이틀 만에 해결할 수 있다.”

▷재정적자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뜻인가.

“사실 유럽 위기보다 더 큰 위기가 미국 재정적자 문제다. 유로존은 실질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위기 탓에 유럽은 경제개혁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시장의 압력’이 없다. 16조달러의 국가부채와 사상 최저 수준의 초저금리에도 불구하고 국제 자금은 오히려 달러와 미국 국채로 유입되고 있다. 3~5년 뒤 유로존이 위기를 극복할 때 시장의 압력은 미국으로 향할 것이다. 그때 위기가 현실화될 수 있다. 미국 당국은 당장 국가부채를 해소할 수 있는 중장기 플랜을 마련해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대선 1차 TV토론회에서 재정건전성 방안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아주 실망스러운 토론이었다.”

▷재정적자를 해결할 묘책이 없나 보다.

“정부 지출을 갑자기 줄일 수는 없다. 한 번 늘려놓은 복지 지출을 축소하려면 엄청난 저항에 부닥친다. 결국 세수를 확충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부자 증세를 반대하는 롬니의 주장은 틀렸다. 부자 증세만 강조하고 중산층 세금은 올리지 않겠다는 오바마의 주장도 잘못이다. 미국이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적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2.5% 규모의 세수를 확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세제개혁을 해야 한다.”

▷오바마와 롬니는 법인세를 내린다는데.

“기업투자 활성화를 위한 세금 인하는 바람직하다. 미국 법인세율 35%는 선진국 중 최고 수준이다. 법인세율은 내리되 소비세(부가가치세), 에너지세, 탄소세 등 새로운 세제를 도입해야 한다. 이 가운데 소비세 도입이 가장 바람직하다. 세수 증대 효과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경제 구조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것이다. 미국은 소비보다 저축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왜 기업들은 투자에 소극적인가.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미국 대기업들이 2조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쌓아두고 있다고 한다. 경제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불확실성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어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기업들이 공화당 정부가 탄생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공화당은 민주당보다 기업들에 더 우호적이다. 법인세 환경규제 금융규제 분야 등에서 특히 그렇다. 기업들은 더 우호적인 정치 환경과 친기업적인 정책이 나오기를 희망하면서 투자를 연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에선 중산층 복원이, 한국에선 소득격차 해소가 큰 이슈다.

“빈부격차는 미국과 한국, 중국 등 전 세계에서 확대되고 있다. 국제화와 기술 진보가 소득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교육과 훈련을 잘 받은 사람들은 기술 진보와 국제화의 이익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기술 진보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교육 프리미엄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소득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세금이나 정부 지출로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저소득층에 대한 기술 등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 역할도 있지만 가정의 역할과 기업의 사회적 역할도 중요하다.”

▷리더십 교체기에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언제나 포퓰리즘 유혹에 쉽게 빠진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5년 동안 포퓰리즘이 큰 세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대부분 선거에서 포퓰리스트(인기영합주의자)가 패배하고 중도파가 승리했다. 미국에서도 포퓰리즘은 거의 없다. 공화당의 롬니 후보도 온건 중도로 분류되고, 오바마도 중도파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50~60년 동안 경제위기 때마다 고소득 국가에서는 포퓰리즘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위기가 닥칠 경우 포퓰리스트들의 극단주의 정책이 위기를 더 악화시킬 것이란 점을 국민들이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

■ 프레드 버그스텐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장은

'G2' 용어 만든 국제경제 전문가…60년대 한국 경제개발 밑그림 참여

프레드 버그스텐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장은 미국과 중국 세계 2대 강국을 의미하는 ‘G2’ 용어를 2007년 처음으로 사용했을 만큼 국제경제 분야에 통찰력이 높은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1967~1968년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 연구원을 거쳐 1969~1971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국제경제담당 자문관을 지냈다. 당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을 보좌했다. 이어 재무부에서 국제경제담당 차관보(1977~1981년)를 역임했고 한때 재무부 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981년 PIIE 설립 이후 줄곧 소장직을 맡고 있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린든 존슨 정부시절인 1964년 국무부에서 일할 당시 한국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밑그림을 그리는 데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다. 사공일 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준비위원장과 절친하다.

유로존 재정위기에 관한 한 버그스텐 소장은 낙관론자다. “유로존은 현재 위기를 개혁의 수단으로 활용해 은행동맹, 나아가 재정동맹을 통해 더욱 강력한 단일통화 체제로 거듭나고 경제 체질을 강화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예언한 비관론자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신빙성 없는 주장만 내놓는다고 비판했다. “루비니는 이탈리아도 디폴트를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며 “매주 위기를 예언하고 항상 비관론만 늘어놓는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