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하철에서 본 탑승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옆자리에 사람을 두고도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조용히 기도라도 하는 듯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마치 세상과 연결된 탯줄마냥 간절하게 붙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살짝 어깨 너머로 보니 문자를 읽고 짧은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스마트폰족은 엄지손가락만 이용하는 ‘수화의 달인’들이다. 어찌나 빨리 자판을 두드리는지 손으로 쓰는 것보다도 빠른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 대화하는 그들은 엄지손가락만 발달한 것이 아니다. 두뇌도 유선전화 세대와는 다르게 진화한다. 인류를 두고 ‘호모 파베르(도구의 인간)’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두뇌는 사용하는 도구에 길들여져서, 그에 맞게 적응하고 발달한다. 스마트폰 화면 위에 140자 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촌철살인의 문구를 생각해내거나 긴 말을 짧게 줄이는 방법을 고안하려고 고심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어제 무도랑 나가수 재방 봤는데 역시 개콘만 못하더라. 오늘밤엔 넝쿨당 본방사수 콜?’ 표준 한국어로 번역해보면 이렇다. ‘어제 ‘무한도전’과 ‘나는 가수다’를 재방송으로 봤는데, 역시 ‘개그콘서트’만 못하더라. 오늘밤에는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재방송 아닌) 본 방송으로 시청하자, 어때?’

몇 해 전부터는 대중가요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대중가요에서 전주가 줄어들거나 아예 생략되는 현상이다. 사연을 알아 보니 인터넷 음원 판매 이후에 생긴 변화란다. 인터넷사이트에서 음원을 구매하기 전에는 초반 1분밖에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음원 판매로 생계를 꾸리는 작곡가들이 노래 초반 1분 내에 핵심 멜로디를 배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고화질 TV의 등장으로 ‘피부 미인’이 각광받고, 내비게이션이 등장한 뒤 길치가 늘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우리의 사고, 생산, 소비 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망치를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는 말에는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도구나 생각의 틀이 처음에는 편의를 제공하지만 조만간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사고가 지배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21세기가 되면서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에 대한 논의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현재까지 온 한국의 많은 기업들에는 혁신적 사고야말로 가장 절실한 필요 중 하나다. 기업가들이 최근 인문학에 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사고를 끌어낼 촉매는 가장 오래된 생각의 단지 안에 담겨 있다. 사람에 대한 통찰이 가득 담긴 문학, 역사, 철학이 엔지니어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기업가의 마음에 씨를 뿌린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대단할 것 없는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시장을 지배한 애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인문학적 통찰력과 엔지니어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스티브 잡스를 그리워한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엔지니어로서 0과 1이 아닌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전문가가 된다는 말은 달리 보면 나머지 분야에서 ‘전문적인 문외한’이 되어 간다는 말이다. 스티브 잡스가 위대한 것은 그가 보통 엔지니어로 남아 있기를 계속해서 거부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상상력을 제한하고 생각을 고착시키는 모든 물리적·심리적 환경에 싸움을 걸어 보자. 고전 소설로 밤을 지새우고, 가곡의 노랫말에 감동하며, 미술작품의 색감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관점이라는 족쇄를 풀고 이 세상을 다각적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할 때 창의적 발상이 가능하다. 도구와 환경이 우리의 사고를 온전히 지배하게 허용하지 말자.

도구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도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도구에도 익숙해지는 것이다. 환경에 지배받지 않으려면 낯선 환경으로 떠나거나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환경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환경을 지배하는 상상력을 키워 보자.

김용성 <세계경영연구원(IGM)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