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건설업체에 다니는 김모씨(47)는 얼마 전부터 치매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몇 해 전부터 나빠진 건설경기 불황에 연일 야근과 야식을 반복해왔다. 거의 매일 술을 먹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불안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주 다음날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술을 마시면서 했던 대화는 물론이고 동석했던 사람들도 가물가물해졌다. 건강에 이상을 느낀 김씨는 부랴부랴 병원을 방문했는데, 검사결과 알코올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담당 주치의에게 “40대에 치매에 걸리는 사람도 있느냐”고 당혹스러워했다.

김광기 동국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형 치매로 진단됐다”며 “40~50대에서 치매에 걸리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중년 치매환자 6년 새 두 배 급증

지난 21일 ‘세계 치매의 날’을 맞아 대표적 노인질환인 치매 공포가 한국사회 중년층을 엄습하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치매로 고통받는 중년층이 급속히 늘고 있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우리나라 치매환자는 52만여명이다.

특히 최근 들어 중·장년층의 치매 발병률이 급증하고 있다. 2006~2011년 6년간 40대 환자 수는 876명에서 1221명으로 40% 증가했다. 같은 기간 50대 치매환자도 3179명에서 6547명으로 두 배나 늘었다. 의료계에선 ‘노화’로 인해 발병하는 치매가 중년층에서도 빠르게 증가하는 것은 불황과 재취업, 직장 스트레스 등을 술·담배로 해소하려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알코올 과다 섭취로 뇌의 기억 전반을 담당하는 해마가 손상을 입는 알코올성 치매 진단 비율이 중년층에게서 매우 높다. 노인은 전체 치매환자의 0.3% 정도인데 40~50대는 10%를 넘는다.

문소영 아주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중년층이 알코올성 치매에 걸리게 되면 평소 잘 알던 단어(지인의 이름 등)가 기억이 나지 않거나 불과 며칠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런 증상은 필름(기억력)이 끊기는 블랙아웃과 같은 기억력 장애”라고 말했다. 문 교수는 또 “뇌의 앞쪽인 전두엽이 손상돼 의부증·의처증 등 의심이 많아지고 충동조절 장애를 보일 때도 있다”고 덧붙였다. 65세 이상 노인은 치매를 방치하면 보통 2~3년 주기로 초기→중기→말기로 진행되지만, 40~50대 중년층은 진단 1년 만에 말기에 이를 만큼 병의 진행 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이다.

지난 밤 기억 가물가물…술탓 말고 치매 의심해야

◆조기치료하면 20년 후 환자 20% 감소

“저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가물가물하네.” “좀 전에 서류를 어디다 뒀지?”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자꾸 뭘 놓고 다니네.” 40~50세쯤 되면 누구나 한두 번 경험하는 증상이다. 이처럼 깜빡깜빡하는 일이 너무 자주 반복되면 ‘나 혹시 치매 아냐?’하고 걱정하게 된다.

그러나 치매와 건망증은 다르다. 치매는 기억 전체를 잊어버리는 것이지만 건망증은 기억의 일부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전문의들은 사소한 일상생활을 얼마나 문제 없이 해내고 있는지(일상생활수행능력)를 치매 진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예컨대 가족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날짜나 요일 개념이 가물가물하고 심지어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까먹어 헤매야 하는 정도라면 치매를 의심해야 한다.

일본 대뇌생리학 대가인 마쓰바라 에이타 박사는 “정상적인 40~50대 가운데 무려 80%에서 이미 치매의 싹이 발견되고 있다”면서 “치매도 암과 마찬가지로 조기발견과 조기치료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재홍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세포가 파괴된 상태에서는 약물로 재생이 불가능하다”며 “치매 약을 일찍 복용할수록 약물의 효과가 커서 치매 증세의 악화를 늦출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치료제로 증상진행 늦출 수 있어

국내에서 처방되고 있는 치매 치료제는 대부분 뇌의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해되는 것을 억제하는 의약품이다. 이를 통해 인지기능이 소실되지 않도록 돕는다. 노바티스의 ‘엑셀론’이 대표적이다.

엑셀론은 일상생활 수행능력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다. 각종 임상 결과 서류 정리를 비롯해 설거지, 쓰레기 처리, 시장에서 물건 사기 등 세부적인 일상생활 수행능력 항목을 유지하는 데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경구용(먹는 약) 외에 붙이는 패치도 출시했다. 500원짜리 동전 크기다. 하루 한 번 몸에 붙이면 24시간 동안 약물이 혈중 약물농도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고르게 전달된다.

김광기 동국대병원 교수는 “치매 환자는 제때 맞춰서 약을 챙겨 먹기가 쉽지 않은데, 패치의 경우 간병인이나 보호자가 쉽게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

도움말=김광기 동국대병원 신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