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국의 3년 이내 단기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사진)는 6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통화정책회의를 가진 후 기자회견에서 “유통시장에서 재정위기국의 3년 이내 단기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기로 결정했다”며 “이는 일부 국가의 국채시장에서 금리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간 상황을 개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왜 3년 만기 국채인가

ECB "유로존 단기국채 무제한 매입"
드라기 총재는 ECB가 매입한 채권에 대한 우선변제권도 포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유로존 회원국들이 디폴트(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졌을 때 ECB가 다른 채권자들보다 우선적인 상환 권한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또 ECB가 매입한 국채는 만기까지 보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채 금리에 상한선을 두는 방안은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드라기 총재는 “채권 매입을 원하는 국가들은 먼저 유로안정화기구(ESM)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며 “또 엄격한 긴축재정 조건도 지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독일의 반대에 대해서는 “채권매입을 통해 풀린 유동성은 충분히 불태화(시중에 돈이 불어나지 않게 하는 것)될 것이기 때문에 물가 상승 압박은 없다”며 “이는 EU조약에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EU협약은 ECB가 발권력을 동원해 회원국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반면 물가 안정을 위한 공개시장조작(중앙은행이 국채나 유가증권 매입과 매각을 통해 물가와 시장금리를 조절하는 것)은 허용한다. 독일은 그간 ECB가 10년 만기 국채를 매입하는 것은 이 조약에 위배된다며 반대해왔다.

ECB의 이번 결정은 3년 만기 이하 단기 국채 매입을 공개시장조작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기 국채를 매입해 돈을 푼 뒤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지급준비율 인상 등 불태화를 통해 유동성을 흡수하는 것은 다른 국가 중앙은행들도 자주 쓰는 정책이다.

이 같은 방식은 재정위기국 국채 매입을 놓고 갈등을 빚어온 유로존 내 여러 국가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 스페인 등 재정위기국은 일단 ‘급전’을 마련할 수 있다.

독일은 반대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국채 매입 뒤 불태화 정책을 쓴다면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매입 재개 방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유선 삼성자산운용 수석애널리스트는 “드라기 총재 입장에서는 독일과 재정위기국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근본적 해결 안 될 듯

ECB가 단기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2013~2014년 자금 수요는 각각 4700억유로, 8000억유로에 이른다. 반면 재정은 거의 바닥난 상태다. 단기 국채를 무제한 발행할 수 있으면 내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장기 국채를 막을 수 있다. 일단 디폴트(채무 불이행)는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단기 자금으로는 유럽 재정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자금을 제조업 등에 투자해 경제를 근본적으로 구조조정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채 매입이 EU협약 위반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불태화 정책을 써야 하는데, 이 경우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시장이 원하는 것은 ECB가 공급한 유동성이 부동산 등 위험자산으로 흡수돼 경제 전반이 활기를 띠는 것”이라며 “단기 국채 매입으로는 일시적으로 국채 금리가 내려가는 효과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드라기 총재는 구체적인 채권 매입 재개 시기 등은 추후 밝히기로 했다. 오는 12일로 예정돼 있는 독일 헌법재판소의 ESM 합헌 여부를 보고 시기를 결정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날 ECB는 기준금리를 연 0.75%로 동결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 불태화(不胎化)

sterilization. 중앙은행이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시중에 풀었던 유동성을 다시 흡수하는 것. 예를 들어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이면 시중 통화량이 증가하고 물가가 오른다. 이 경우 중앙은행은 국채 매입과 동시에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하거나 지급준비율을 인상해 전체 통화량을 국채 매입 이전과 같게 만들어 물가 인상을 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