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망가지는 역할은 왜 나만 시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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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민망하게 하는 것 - 회사 장기자랑때 고무장갑 쓰고 '엽기 댄스'
얼굴은 알려졌지만
회사 홍보 동영상 모델 출연…어색한 연기 '눈 뜨고 못보겠네'
영화제 같은 시상식?
"우수사원 과연 누구일까요"…'닭살' 멘트 하느라 진땀
전직원 앞에서 '삑사리'
정기 조회때 진행 맡았는데 "전체 앉아" 반말로 '웃음바다'
얼굴은 알려졌지만
회사 홍보 동영상 모델 출연…어색한 연기 '눈 뜨고 못보겠네'
영화제 같은 시상식?
"우수사원 과연 누구일까요"…'닭살' 멘트 하느라 진땀
전직원 앞에서 '삑사리'
정기 조회때 진행 맡았는데 "전체 앉아" 반말로 '웃음바다'
건강보조기구 업체에 다니는 현 대리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메신저 등을 통해 지인들이 보내온 글을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체구가 건장한 그는 2년 전 회사 임원의 지시로 자사 건강보조기구를 사용하는 광고 동영상의 모델을 맡았다. 기구 사용법을 시연하는 장면을 찍을 때만 해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사용 후 땀을 닦으며 과장된 미소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한껏 치켜세우는 장면은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촬영 후 부장에게 편집하자고 통사정을 했지만, 부장은 “전무님한테 직접 얘기하라”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현 대리가 나온 동영상은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통해 인터넷에 소개되고 한동안 몇몇 사이트의 배너광고에도 걸렸다. 그는 친구들과 선,후배 사이에서 유명인이 됐다. 그가 나온 대학 과에는 ‘자랑스러운(?) 현 선배님’이라는 글과 함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사진이 걸렸다.
김 과장, 이 대리들은 회사 생활하면서 두 번째로 하기 싫은 일이 ‘힘든 일’이라고 한다. 그럼 첫번째로 하기 싫은 일은? 바로 ‘민망한 일’이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회사는 나에게 엉뚱한 일도 시킨다. 얼굴이 빨개지고, 손과 발은 동시에 오그라드는 느낌. 시간은 왜 이렇게 더디게 가는지… 아, 내가 정녕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는 건가.
◆내 이름은 ‘모레노’
“어이 모레노~ 와서 심판 봐야지.”
식품업체에 다니는 심 대리는 체육대회 날이 되면 이렇게 놀려대는 직장 상사들 때문에 죽을 맛이다. 그가 모레노라고 불리는 이유는 몇 년 전 사내 광고 포스터 모델로 뽑혀 2002년 월드컵 축구 한국-이탈리아 전에서 주심을 맡았던 모레노 심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평소 준수하게 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그였지만, 착 달라붙은 2 대 8 가르마에 잔뜩 힘을 준 근엄한 눈빛으로 레드카드를 치켜들고 “화학조미료 추방합니다”라고 외치는 광고에서는 영락없는 모레노 심판이었다. 포스터가 사내에 배포되던 날, 회사는 난리도 아니었다.
◆‘화목한 정 과장’
정 과장은 지난해까지 한 대기업의 미국 법인에 근무했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 한번은 본사 사내커뮤니케이션 직원들이 현지로 출장을 왔다. 해외 현지 법인 직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회사 창립기념일에 강당에서 상영한다는 것.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이야 자연스럽게 보여주면 됐지만, 문제는 가족들과 같이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촬영한다는 것이다.
촬영팀이 집에 오고 나서 정 과장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을 연출해야 했다. 스쿨버스에서 내린 딸은 ‘아빠’를 외치며 뛰어왔고, 집 앞에 서있던 정 과장은 해맑은 미소로 팔을 벌려 반기는, 이게 컨셉트! 거기에다 가족들과 야외 정원에서 밝디밝은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며 바비큐 파티를 하는 장면도 담았다. 촬영 당시에도 쑥스러웠지만 전 직원이 이를 지켜볼 생각을 하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본사에 복귀한 지 한참 됐지만 그의 별명은 여전히 ‘화목한 정 과장’이다.
◆회사 송년회가 ‘대종상 시상식’
중견 전자제품 업체에 다니는 황 주임은 지난해 연말 모범사원 시상식을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인사팀 과장이 딱딱하게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부드럽고 재미있게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젊은 남녀 사원들에게 공동 진행을 맡긴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이 지시한 컨셉트는 영화제 시상식이었다.
황 주임은 인사팀에서 대본을 받아보고 아연실색했다. “이번은 경쟁이 가장 치열한 영업부문 남자 우수사원입니다. 누군지 궁금한데요” “그러게요. 저도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TV에서나 듣던 ‘닭살’ 멘트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미 수상자까지 다 알려져 있는데 무엇이 궁금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얘기인지.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황 주임이 속한 마케팅 팀 직원들은 웃음을 참느라, 그들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앉아!
강 대리가 다니는 회사는 매달 첫 근무날 정기조회를 실시한다. 경영실적 발표와 사장님 훈시가 있는 공식행사다. 기존에는 총무 팀장의 딱딱한 사회로 진행했으나, 부드러운 말투의 여직원이 사회를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자 총무팀장은 홍보팀 여직원 강 대리를 지목했다. 강 대리는 철저한 대본연습 끝에 첫 조회진행을 맡았다. 확실히 여직원의 상냥한 목소리 때문인지 분위기는 한층 밝고 가벼워졌다.
그는 직원들이 다 모이자 대본에 있는 대로 “전체 차렷!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겠습니다”라며 또렷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진행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 ‘삑사리’를 내고 말았다. 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차렷’과 같은 명령조로 “전체 앉아!” 해버린 것. “????” 사장을 비롯해 임직원들이 자리에 앉긴 했으나 저마다 큭큭 거렸다. 강 대리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고무장갑만 보면…
대기업 직원 서 대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회사 수련회는 절대 가지 않게 됐다. 입사한 지 1주일 된 신입사원 시절, 그는 회사 수련회에서 다른 여자동기 두 명과 함께 장기자랑을 하게 됐다. 하지만 서 대리는 장기자랑으로 내세울 만한 게 단 한 가지도 없었고, 다른 동기들도 모두 음치와 몸치여서 난감한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망가지는 것으로 자신들의 ‘무능’을 커버하기로 했다. 서씨는 동기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분홍색 빨래용 고무장갑을 머리에 쓴 채 당시 한 개그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끌던 ‘고음불가’를 패러디했다. 세 명의 여성이 고무장갑을 쓰자 곳곳에서 박장대소했다. 좀처럼 웃지 않는 나이 지긋한 임원들도 배를 잡고 웃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문제는 그들의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 사진에 담긴 채 사내 게시판에 올라와 버린 것. 한동안 게시판에서 조회수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이후 (그 사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동기 2명은 퇴사했고 저만 남아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론 회사 수련회는 절대로 가지 않게 됐죠.”
고경봉/김일규/강경민/윤정현/강영연/정소람 기자 kg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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