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 장편소설 《나의 삼촌 부르스 리》에선 70년대 외화 쿼터로 먹고 살던 영화계 실상을 잘 보여준다. 영화계 거물인 유 회장은 3류영화 여러 편을 만들어 따낸 외화 수입권으로 떼돈을 번 인물이다. 그가 만든 용팔이류의 영화는 변두리극장 동시상영용이거나 아예 창고로 직행했지만 돈 되는 외화 한두 편으로 대박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영화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할리우드 공동배급사인 UIP가 1988년 9월 직배에 나선 것이다. 첫 직배영화 ‘위험한 정사’가 코리아극장 신영극장에 걸린 날 객석에 뱀을 풀어놓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결사(巳)항쟁’의 주역은 영화 ‘부러진 화살’을 만든 정지영 감독이었다. 이듬해 강남 씨네하우스에선 방화사건까지 터졌다.

70년대 이래 한국영화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80년대 초 컬러TV가 등장할 때도, 90년대 PC 보급으로 불법 다운로드가 판을 칠 때도 그랬다. 컬러TV와 PC를 상대로 투쟁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스크린쿼터 축소는 눈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었다. 정부는 극장의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스크린쿼터)를 연간 146일에서 1998년 106일, 2006년 다시 73일로 줄였다. 삭발 단식 시위가 난무했다. 한국영화는 다 죽었다는 비관론이 팽배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한국영화는 역설적으로 제2전성기를 맞았다. 상반기에만 4418만명이 한국영화를 관람해 점유율이 53.4%에 이른다. 8월 점유율은 70%에 육박해 비교할 나라가 없을 정도다. 올 들어 관객 400만명을 넘긴 영화만도 벌써 7편이다. 오죽하면 할리우드 영화들이 한국영화를 피해 개봉날짜를 정한다는 판이다.

스크린쿼터가 무의미해진 상전벽해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한마디로 한국영화의 내공이 세진 것이다. 팝송과 경쟁한 K팝이 그랬듯이 K무비도 개방과 경쟁 속에 나라 안팎에서 팔리는 상품이 됐다. 스토리텔링과 그에 걸맞은 생산능력이 결합해 관객이 찾는 영화를 만들어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는 과거 극장에 뱀을 풀고 삭발 단식했던 영화인들이 대답할 차례다.

사실 한국만큼 시장개방 때마다 반발이 극심한 나라도 드물지만 개방해서 망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월마트 까르푸가 울고 갔고, 맥도날드 스타벅스도 1등을 못하는 나라다. 논에 메기를 풀어놓으면 미꾸라지가 더 잘 자라듯, 한국인은 벅찬 상대와 싸울 때 되레 더 강해지는 DNA를 가졌나 보다.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스크린쿼터나 영화진흥기금에서 나온 게 결코 아니다. 평론가 뺨치는 요즘 관객들에게 국산품(한국영화) 애용하라면 코웃음 칠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영화 발전의 토양이 또 있을까.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