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웃기는 '푸어(poor)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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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하우스푸어(house poor) 워킹푸어(working poor) 리타이어푸어(retire poor) 에듀푸어(edu poor) 소호푸어(soho poor) 스터디푸어(study poor) 허니문푸어(honeymoon poor) 베이비푸어(baby poor)….
요즘 언론에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는 각종 푸어 시리즈들이다. 뜻은 대충 이렇다. 집이 있어도 대출 원리금 갚기가 어려운 사람, 직업이 있지만 가난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 노후 대비를 못한 은퇴자, 아이들 교육비로 허리가 휘는 사람, 장사가 안 되는 영세 자영업자, 등록금 마련이 어려운 대학생, 결혼준비로 돈이 바닥난 부부, 아기 양육비 부담이 너무 큰 사람.
어느 푸어 신드롬이든 결론은 비슷하다. 경기 침체와 물가상승, 일자리와 소득감소, 양극화 등으로 주인공들의 삶이 팍팍하니 뭔가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식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 때문에 온갖 푸어가 양산되는 만큼 그 대책도 국가나 사회가 세워주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물론 이들의 삶이 피곤한 건 사실이다. 또 그렇게 된 데는 정책실패 탓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론 가난하지 않은 푸어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각종 푸어 신드롬의 주인공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이들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하우스푸어는 집이, 워킹푸어는 직장이 있고 에듀푸어는 어쨌든 아이 사교육을 시킬 정도는 된다. 소호푸어는 자신의 사업체가 있고 허니문푸어나 베이비푸어는 배우자 또는 아이가 있는 사람들이다. 다는 아니더라도 이들 대부분은 소중한 그 무언가를 이미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투기심이나 허영심 때문에 무리한 지출을 감행하는 사람들까지 끼어 있다. 그런 이들을 한데 묶어 모두 ‘푸어’로 부르는 게 과연 옳을까.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이들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면서 취약 계층은 오히려 대중의 관심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지고 소외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온갖 하우스푸어 대책을 마련 중인 정치권에서 요즘 무주택자 대책을 찾아보기 힘든 게 대표적이다.
경제는 어디까지나 자기책임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긴다는 부작용도 있다. 푸어 신드롬은 더 큰 집, 더 좋은 직장, 더 나은 노후, 더 좋은 대학, 더 훌륭한 육아 등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끊임 없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자책하게 만든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42.8%로 통계청의 가처분소득 기준 중산층(64%)보다 훨씬 적게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신을 저소득층(50.1%)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통계청 분류(15.1%)의 세 배가 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푸어 신드롬의 대상이 된 것을 모두 사회탓, 남탓으로 돌리려는 현상도 우려된다. 이런 경향은 특히 정부와 정치권이 부추기고 부풀린 측면이 크다. 정권심판론에서 시작해 동반성장 공생발전, 경제민주화와 같은 구호들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지금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내탓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세력 내지는 재벌이나 대기업 때문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경제는 어디까지나 자기책임이다. 더욱이 온갖 푸어 신드롬의 대상자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인지,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할 대상인지도 의문이다. 혹시 대중의 막연한 분노를 이용해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 푸어 신드롬이 이용돼 온 건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요즘 언론에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는 각종 푸어 시리즈들이다. 뜻은 대충 이렇다. 집이 있어도 대출 원리금 갚기가 어려운 사람, 직업이 있지만 가난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 노후 대비를 못한 은퇴자, 아이들 교육비로 허리가 휘는 사람, 장사가 안 되는 영세 자영업자, 등록금 마련이 어려운 대학생, 결혼준비로 돈이 바닥난 부부, 아기 양육비 부담이 너무 큰 사람.
어느 푸어 신드롬이든 결론은 비슷하다. 경기 침체와 물가상승, 일자리와 소득감소, 양극화 등으로 주인공들의 삶이 팍팍하니 뭔가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식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 때문에 온갖 푸어가 양산되는 만큼 그 대책도 국가나 사회가 세워주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물론 이들의 삶이 피곤한 건 사실이다. 또 그렇게 된 데는 정책실패 탓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론 가난하지 않은 푸어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각종 푸어 신드롬의 주인공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이들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하우스푸어는 집이, 워킹푸어는 직장이 있고 에듀푸어는 어쨌든 아이 사교육을 시킬 정도는 된다. 소호푸어는 자신의 사업체가 있고 허니문푸어나 베이비푸어는 배우자 또는 아이가 있는 사람들이다. 다는 아니더라도 이들 대부분은 소중한 그 무언가를 이미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투기심이나 허영심 때문에 무리한 지출을 감행하는 사람들까지 끼어 있다. 그런 이들을 한데 묶어 모두 ‘푸어’로 부르는 게 과연 옳을까.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이들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면서 취약 계층은 오히려 대중의 관심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지고 소외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온갖 하우스푸어 대책을 마련 중인 정치권에서 요즘 무주택자 대책을 찾아보기 힘든 게 대표적이다.
경제는 어디까지나 자기책임
상대적 박탈감을 부추긴다는 부작용도 있다. 푸어 신드롬은 더 큰 집, 더 좋은 직장, 더 나은 노후, 더 좋은 대학, 더 훌륭한 육아 등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끊임 없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자책하게 만든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42.8%로 통계청의 가처분소득 기준 중산층(64%)보다 훨씬 적게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신을 저소득층(50.1%)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통계청 분류(15.1%)의 세 배가 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푸어 신드롬의 대상이 된 것을 모두 사회탓, 남탓으로 돌리려는 현상도 우려된다. 이런 경향은 특히 정부와 정치권이 부추기고 부풀린 측면이 크다. 정권심판론에서 시작해 동반성장 공생발전, 경제민주화와 같은 구호들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지금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내탓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세력 내지는 재벌이나 대기업 때문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경제는 어디까지나 자기책임이다. 더욱이 온갖 푸어 신드롬의 대상자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인지,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할 대상인지도 의문이다. 혹시 대중의 막연한 분노를 이용해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 푸어 신드롬이 이용돼 온 건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