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중국에 '서구 법치주의' 뿌리 못내린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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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선진국과 후진국…수천년 역사 넘나들며 비교
종교·지리 등 정치발전에 영향
정치질서의 기원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 함규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598쪽 / 3만원
종교·지리 등 정치발전에 영향
정치질서의 기원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 함규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598쪽 / 3만원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사회와 민주적인 정부를 갖고 있는 덴마크를 살기 좋은 나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누구나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나라를 덴마크처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덴마크의 현 제도를 개발도상국에 이식하려는 시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다. 왜일까.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을 보며 1992년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치 질서의 기원》에서 왜 선진국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정치체제를 다른 국가는 갖고 있지 못한지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한 국가의 현재 정치질서는 어느날 갑자기 선물받은 것이 아니다. 수백년 또는 수천년 전의 사상과 종교, 지리적 요건, 기후 및 이에 따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등 수많은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체제다. 이 복잡다단한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단선적으로 이식한 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후쿠야마는 이 많은 요인을 일관되고 짜임새 있게 비교하며 동양과 서양, 선진국과 후진국, 전근대와 근대를 넘나드는 대장정을 펼쳐 보인다. 물리적으로는 몇 시간의 비행으로 갈 수 있는 나라 간의 비교지만, 시간적으로는 수천년의 정치 발전 과정을 넘나드는 여행이다. 좀 더 과학적인 비교를 위해 후쿠야마는 홉스, 로크, 루소의 철학과 인간의 본질을 밝히는 생물학까지 파고드는 노력을 보여준다.
다소 보수적인 기준이지만 그는 정치 발전의 정도를 가늠하는 세 가지 조건으로 근대국가, 법치주의, 책임정부를 제시한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국가에서 △정치 권력을 가진 자가 법의 구속을 받으며 △국민의 지지에 의해 수립되고 결과에 따라 책임지는 정부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면 정치가 고도로 발전한 사회라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중국 인도 유럽 등을 예로 들며 이 조건을 세부적으로 파고든다. 예컨대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라 때부터 막스 베버가 이야기한 근대국가의 조건을 대부분 갖췄다. 하지만 황제 한 사람이 주권과 종교를 모두 거머쥐고 있었기에 법치주의의 전통은 존재할 수 없었고 책임 정부 또한 불가능했다.
인도는 달랐다. 인도 역사의 대부분은 작은 왕국과 공국들이 난립해 다투는 상태였고, 강력한 중앙집권은 이뤄지기 힘들었다. 브라만교의 전통은 종교가 정치 권력을 충분히 견제하도록 했고 성직자는 무사 계급조차도 통제할 수 있었다. 국가의 힘은 약했고, 자치를 누리는 사제 집단은 공동체의 정의가 ‘우연히’ 왕좌에 앉은 자의 의지보다 앞선다는 일종의 법치주의를 확립했다.
이런 역사는 두 국가의 현재까지 이어진다. 중국은 강력한 국가를 수립했지만 아직 법치주의와 책임정부는 갖지 못했다. 인도는 국가는 약하지만 법치와 강한 사회조직의 전통이 있다. 후쿠야마에 따르면 인도가 집회와 시위가 가능한 민주주의의 길을 걸은 건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후쿠야마는 지역의 물리적 조건도 정치 발전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의 많은 곳에서 국가가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긴 강이 별로 없고, 사막과 열대 우림에서 길을 닦고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부분 산악 지형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부족 근거지 등도 마찬가지다. 일찍이 페르시아, 영국, 소련과 현재의 미국이 모두 아프가니스탄의 부족을 복속시키려 했지만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산악 지형의 영향이 컸다.
598쪽에 달하는 이 책은 정치의 기원과 과정의 모든 면을 보여주려 한 대작이다. ‘역사는 이렇게 발전해 왔다’는 후쿠야마의 메시지를 읽어나가다 보면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