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뫼렌 지방에는 ‘결혼은 창문을 통해 이뤄진다’는 속담이 있다. 중세의 미혼남녀 사이에서 유행한 특이한 구애 방식에서 비롯된 속담이다. 총각은 일요일이나 축제일, 축제일 전날 한밤중에 마음에 둔 처녀의 집을 찾는다. 지붕을 뚫거나 다락방 좁은 창문을 넘는 등 특이한 방법으로 처녀의 방에 들어간다.

그 경로가 어려울수록 사랑의 크기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밤중에 고생스럽게 처녀를 만난 총각은 목적(?)을 달성했을까.

서양사학자 양태자 씨의 《중세의 뒷골목 사랑》은 중세시대 성(性) 풍속사다. 게르만족 미혼남녀의 ‘찾아가는 밤’을 통한 사랑 찾기, 민간처방으로 전해지는 신랑감 찾는 처방과 성애를 위한 마법의 재료들, ‘결혼을 도와주는 남자’를 통한 아이 낳기, 신부의 지참금과 아침 선물 등 다양한 모습의 중세 성풍속이 소개돼 있다.

불한당처럼 처녀의 집에 쳐들어간 총각은 불쌍하게도 ‘섹스를 하거나 에로틱한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고 한다. 처녀와 함께 침대에 누울 수는 있었지만 옷을 입은 채여야 했고, 처녀가 잠들기 전까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처녀 방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이상한 짓을 해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호된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총각이 이렇게 몇 번 처녀를 찾아가면 처녀가 입은 옷 두께가 얇아졌고, 자연스레 결혼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귀족 사회에는 ‘대리 결혼’도 있었다고 한다. 중세에는 잔치에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 신랑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때 믿을 만한 사람으로 ‘대리 신랑’을 세웠다.

식을 치른 뒤에는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치르기 위해 침대에 드는 절차가 있었다. 그것도 하객이 보는 앞에서다. 물론 서로의 장딴지를 대는 등의 상징적인 행위로 대신했지만 꽤 이상한 풍습이었던 것 같다. 주로 빈과 마드리드에 있는 합스부르크가가 애용한 이 대리 결혼 제도는 1880년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중세의 이런 성 문화는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부부의 성 생활까지 규제한 당시 그리스도교의 확산 속도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저자는 “북유럽 지방은 게르만족의 풍속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지만, 남유럽은 일찍부터 교회의 권위에 눌리다 보니 민간풍속도 그리스도교 풍속과 뒤엉켜 특이한 형태로 이어져 오게 됐다”고 설명한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