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남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의 이름은 ‘바람찬 흥남부두’로 유명한 함경남도 흥남(興南)과 한자가 같다. 그의 아버지가 흥남에 들렀다가 아들 이름을 흥남으로 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김 원장은 요리가 나오기 전에 “막걸리부터 한잔 하자”며 잔을 채워 건배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님은 일제 때 대구상고를 나와 만주 조선은행 장춘지점에서 일하다 징용통지서를 받았답니다. 착잡했겠죠. ‘살아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 족적이나 남기자’는 생각으로 두만강부터 대구까지 3500리를 110일 동안 걸어서 내려왔답니다. 도중에 흥남에 들렀는데, 흥남비료공장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나 봐요. 그래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이런 큰 공장의 공장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래서 살아 돌아와 첫 아들을 낳자 이름을 ‘흥남’이라고 지었는데 그게 접니다.”

김 원장은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고하며 “흥남비료공장의 공장장은 될 수가 없고 다른 큰 공장의 공장장도 되지 못했으니 불효자식”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초등학생 때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선생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4학년 때 백순달 선생님이 과학을 참 재밌게 가르치셨습니다. 학생 다섯명으로 과학반을 꾸렸는데 봄에는 대구 수성 들판에서 배추벌레를 잡아 나비가 될 때까지 관찰하게 하기도 하셨고…. 그때부터 커서 과학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갈 때는 아무런 의심 없이 서울공대를 택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동사무소 프로젝트

김 원장은 육군하사관학교에서 군복무를 했고 제대하자마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KIST 산하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담당했는데 이 연구소는 1998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통합됐다.

30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일했다면 기억에 남을 프로젝트도 많을 터. 첫 번째로 꼽고 싶은 프로젝트는 뭐냐고 물었다. 김 원장은 야릇한 웃음을 짓더니 “일단 보리굴비 안주에 한 잔씩 더 합시다. 이게 이 집 별미예요” 하며 잔을 내밀었다. 쭉 들이켜고 나서는 결혼 직전에 했던 동사무소 행정 정보화 프로젝트 얘기를 꺼냈다.

“연구원 10명이 서울 논현동 동사무소 2층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주민 2만명의 주민등록 등 각종 데이터를 20메가바이트(MB)밖에 안되는 저장장치에 압축해서 입력해야 했습니다. 주민등록 원본을 복사해 홍릉 전산실에 가져가서 키펀칭 방식으로 입력하고 그걸 인쇄해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확인하고…. 1년 반 만에 프로젝트를 끝낸 다음 홍성원 당시 청와대 비서관 등 정부 고위 관리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시연을 했습니다. 홍 비서관이 그걸 보고 ‘이 정도면 전국 동사무소에 보급해도 되겠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전자정부 사업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김 원장이 이 프로젝트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어느 날 동료 연구원이랑 KIST 전산실에서 밤샘작업을 하고 아침 일찍 출근했는데 동료가 복도에서 어떤 여자랑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누구야. 나 좀 소개시켜 줘’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렇잖아도 소개시켜 주려고 했어. 11그룹(교통전산화 담당) 연구원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 여자가 제 아내입니다. 평소와 달리 일찍 출근했다가 저를 만난 거죠.”

◆문전박대로 시작한 SAN 프로젝트

김 원장이 잊을 수 없는 프로젝트는 또 있다. 실무작업까지 담당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중공업과 함께 진행했던 선박장치 간 네트워크(SAN) 프로젝트다.

“2007년 임베디드(내장) 소프트웨어 단장 때 전임 최문기 원장이 ‘임베디드 기술을 조선산업에도 적용하자’고 하기에 ‘알았습니다’고 대답한 뒤 다음날 새벽 울산 현대중공업으로 내려갔습니다. 담당 상무가 다짜고짜 ‘국책과제 따려고 그러는 것이냐. 우린 그런 것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왜 임베디드가 중요한지 강하게 얘기했습니다. 결국 배에 올라 거미줄처럼 뒤엉킨 통신선의 문제를 파악한 뒤 프로젝트를 하게 됐습니다.”

김 원장은 선박에 SAN을 적용하면 얽히고 설켜 있는 통신선을 10분의 1로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지 본사에서 배의 운항 상태를 모니터링할 수도 있고 배가 해적한테 끌려갈 경우엔 엔진을 끌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장점이 알려지면서 개발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덴마크 선사가 컨테이너선 18척에 SAN을 탑재해 달라고 현대 측에 요청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SAN 탑재 선박 수주량은 111척에 달한다.

김 원장은 ETRI 연구원 시절 미국에서 전산학 석·박사 학위를 따낸 학구파이기도 하다. 기자가 “선친께서 영남대 총장까지 하셨으니 집안도 넉넉했을 테고…. 유학생활이 어렵지 않았겠네요”라고 말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고했다.

“1987년 석사과정 때 1달러99센트짜리 햄버거를 1달러49센트에 먹을 수 있는 할인 쿠폰이 생겨서 아내와 함께 먼곳까지 갔는데 직원이 ‘기간이 지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1달러99센트를 주고 사먹느냐 마느냐를 놓고 10분 동안 고민하다 그냥 돌아선 적이 있습니다. 참 어려웠습니다. 석사과정도 그렇고 박사과정도 그렇고, 기를 쓰고 장학금을 받아야 했습니다.”

◆기술경영자로 변신

김 원장은 2008년 9월부터 2009년 8월까지 1년 동안 미국 MIT 슬론경영대학원 연수를 다녀왔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경영과 관리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자비를 들여 스위스까지 가서 수강한 1주일짜리 ‘기술연구원 관리’ 강좌는 김 원장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준 기회였다.

“교수가 ‘기술연구원은 창의성과 생산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주더군요. 간단합니다. 창의성은 조직문화로 잡고, 생산성은 기강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의적인 조직문화를 만들려면 남과 달리 생각하고(think different), 남의 얘기를 듣고(listen to others), 일을 즐겨야(enjoy work)한다는 겁니다. 반면 생산성을 높이려면 절차를 지키고(keep process), 기한을 엄수하고(keep timing), 책임을 져야(be responsible) 한다는 것입니다. 원장을 맡고 나서 마우스패드에 이 6가지 문구를 적어 연구원들에게 나눠줬습니다.”

"현재보다 100배 빠른 기가급 통신 개발 추진"

김 원장에게 “연구원장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명확했다. “기술연구원을 이끌려면 세 가지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테크니컬 리더십입니다. 축구 감독은 축구를 알아야 합니다. 기술연구원장은 기술을 알아야죠. 둘째는 글로벌 리더십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글로벌 무대에서 놀았기에 동네축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감성적인 리더십입니다. 홍명보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빙글빙글 돌잖습니까. 감성적으로 선수들이 따르게 하는 거죠. 이 세 가지 리더십을 갖춘 사람이면 기술연구원을 이끌 수 있다고 봅니다.”

김 원장은 ETRI 원장이 되고 나서 ‘도넛 데이’라는 정기 행사를 만들었다. “매주 금요일 오전 9시에 팀별로 도넛과 커피를 주고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도록 했습니다. 저도 청바지 차림으로 아무 팀에나 끼어 얘기를 듣습니다. 처음엔 다들 ‘쓸데없이 이런 걸 왜 하느냐’, ‘할 얘기가 없다’고 하더니 지금은 그 시간이 즐겁다고 합니다. 이런 기회가 있어야 ‘저 친구는 딸만 셋이구나’ ‘등산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죠. 인간적으로 소통이 이뤄지면 일도 잘 풀립니다.”

◆‘기가 코리아’ 프로젝트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김 원장 얼굴도 불그레해졌다. 김 원장이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우는 사이에 다소 껄끄러운 질문을 던졌다. “선배들은 4메가 D램도 개발했고, TDX(전전자교환기)도 개발했고, CDMA(부호분할다중접속)도 개발했습니다. 요즘 ETRI는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김 원장은 “허허허” 하고 웃더니 답을 했다. “모바일 트래픽 폭증에 대비해 ‘기가 코리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동 중에 초당 1기가비트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기술과 테스트베드, 관련 시스템 등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기가급이라면 지금의 이동통신보다 100배쯤 빠릅니다. 지식경제부가 주관하고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교육과학기술부 등 7개 부처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 시연하면 메가급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은 홀로그램 등 기가급 서비스를 보면 놀랄 겁니다.”

김 원장은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각계 인사들을 끈질기게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후식이 나올 무렵 이 음식점에 관해 한 마디 했다. “한번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교수가 찾아왔기에 이곳에서 식사를 같이 했는데 보리굴비가 맛있다고 해서 한 마리 담아 드린 적도 있다”며 “보리 사이에 넣어서 숙성시킨다고 해서 보리굴비”라고 설명했다.


김흥남 원장의 단골집 예조

삼합·보리굴비가 일품…IT인들도 즐겨 찾아

서울경찰청과 사직공원 중간에 있는 세종로성당 옆 전라도식 한식집 ‘예조’는 오래 전부터 정치인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옛 이름 ‘장원’)으로 유명하다. 주인이 바뀌고 이름도 바뀌었지만 음식 맛은 전과 비슷하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인근 세종문화회관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어 방통위 전신인 정보통신부 시절부터 정보통신업계 관련 인사들도 자주 찾는다. 김흥남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은 서울에 올라와 사람을 만날 일이 있으면 이곳에 들르곤 한다.

이 음식점에서는 삼합과 보리굴비가 나온다. 삼합은 홍어와 삼겹살을 묵은김치에 싸먹는 전라도 음식이다. 보리굴비는 반찬 또는 술안주로 인기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 차가운 녹찻물에 담갔다 꺼내 보리굴비를 얹어 먹으면 일품이다. 쑥인절미는 전라도에서 가져온 쑥으로 만든 떡이다. 쑥과 콩가루가 어우러진 맛이 그만이다. 밥이 나올 때는 조기찌개도 곁들여진다. 점심은 3만5000원, 5만원짜리가 있고 저녁은 5만5000원, 7만5000원짜리가 있다. (02)730-4646

김광현 IT전문기자 k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