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은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진 한 해였다.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 점령된 해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며 38선은 뚜렷해져서 1948년에는 남북 분단의 선이 됐고, 1950년에는 동족상잔의 선이 됐다. 이 무렵 독립운동가 이관구(李觀求)는 《신대학(新大學)》을 집필했다. 이관구는 해방 3년사의 회한을 담은 이 책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 했을까.

‘옛날 조선이 강성했을 때는 하와 은을 뛰어넘는 문명이 있었고, 수와 당을 능가하는 기세가 있었으니, 참으로 당세의 웅장한 기백이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아, 분하다.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분단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떠들썩하게 울부짖고,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를 보호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빙그레 웃는다. 장상관리는 외국인의 안색을 엿보고 마치 효자가 부모를 섬기듯 먼저 뜻을 받들 생각을 한다. 사농공상은 외국인의 숨소리만 들어도 환영하고 마치 유기(遊妓)가 정인(情人)에게 아양 떨듯 뛰어나가 받들며 분주히 달린다.’

이관구의 울분은 이렇게 이어진다.

‘옛날부터 민심이 전제(專制) 하에 있다가 갑자기 해방이 되니, 그 민심의 문란한 상태가 마치 홍수와 풍파처럼 일어나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가 영웅이고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가 애국자이고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가 주의사상가(主義思想家)라고 해, 영웅과 애국자와 주의사상가가 조선 천지에 가득찼다. 이들에게 건국과 치국의 방책을 물으면 흉중에 도무지 한 가지 계책도 없고 (…) 아, 애통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포를 훼방하는 마음은 있으나 동포를 존앙하는 마음은 없다. ’

말은 사회의 거울이다. 우리나라 말에 ‘공자왈맹자왈(孔子曰孟子曰)’이 있다. 공자와 맹자를 거론하면서 아는 척한다는 뜻인데, 그 앎이 편협하고 고지식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어감이 담겨 있다. 공자와 맹자는 유가의 성현인데 ‘공자왈맹자왈’이라는 말은 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는 것일까.

누군가는 말하리라. ‘공자왈맹자왈’이란 말은 있어도 ‘노자왈장자왈’이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 우리 전통 사회의 지식인이 너무 유가 독존적인 성향이 있어서 그에 대한 반감이 스며든 것이겠지.

모두 일리있는 견해다. 하지만 《대학》의 학문 정신이 쇠락한 데에 문제의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수록된 ‘독대학법(讀大學法)’을 보면 《논어》《맹자》는 성현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유학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이론서는 아니다. 이를 읽고 문학적인 감동과 철학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을지언정 과학적인 사유를 얻을 수는 없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보편적인 테제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는《대학》이야말로 주자학의 학문 정신이 발산되는 핵심 문헌이었다.

《대학》이 스러진다면 《논어》《맹자》는 언제든 ‘공자왈맹자왈’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논어》《맹자》는 과거의 고전이고 과거의 고전을 해석하는 현재의 사회과학이 곧 《대학》이었기에, 실천적인 지성인들은 자기 시대의 《대학》을 창출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도도한 흐름이 급기야 8·15 해방 후에도 이어져 이관구의 《신대학》이 출현한 것이다.《대학》의 사유 형식과 양계초의 사상 내용으로 해방 후 한국 사회에 민족(民族)과 신민(新民)의 메시지를 전한 《신대학》.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나라 주자학 전통의 현대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1945년 이후에도 시대와 씨름하는 유학은 가능했다는 것, 진정한 유학은 어쩌면 과거를 다루는 고전인문학의 모습보다 현재를 다루는 사회과학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잃어버린 현재성을 되찾지 못하는 고전학은 언제든지 ‘공자왈맹자왈’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해보며 21세기 한국 지성사에도 다시 《신대학》과 같은 지적인 도전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노관범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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