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원 코리안리재보험 사장, 재보험 아시아 1위 바탕엔 '海兵 야성'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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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社 1병영 나의 병영 이야기]
1966년 해병 181기로 입소
"할수 있다…안되면 되게 하라"
한계 짓지 않는 '또다른 나' 발견
1966년 해병 181기로 입소
"할수 있다…안되면 되게 하라"
한계 짓지 않는 '또다른 나' 발견
해발 4000m를 넘어면서부터 숨이 꽉 막히고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대원들 역시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고 두통과 호흡곤란으로 얼굴이 굳어 있다. 나는 지금 무산소 등정으로는 최고 지점인 해발 5550m의 에베레스트 칼라파타르봉 정상을 향해 직원들과 함께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이런 극한의 육체적 고통을 얼마 만에 겪어보는가. 지난 10년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정신과 육체를 단련해왔지만 이런 고통, 아니 죽을 수도 있다는 극심한 공포심은 군대 시절 이후 처음이다.
내가 해병대에 입대한 것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이다. 당시 나 자신을 강하게 단련하고 싶다는 생각에 덜컥 지원했다. 해병대는 입대와 동시에 대부분 베트남전에 투입되던 때라 충격과 걱정에 휩싸인 가족들을 뒤로 한 채 해병 181기로 훈련소에 입소했다. 함께 입대한 동기는 750명. 그 중 500여명이 파병됐고 상당수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부대는 베트남에 가진 않았지만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전장으로 떠나야 했기에 하루하루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이다보니 부대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고참들의 위세도 대단해서 ‘신고 빠따’ ‘기수 빠따’처럼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구타가 반복돼 엉덩이에는 늘 피딱지를 달고 살았다. 한 번은 훈련 후 내무반에 복귀하니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고 담요가 사라졌다.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딱딱한 매트리스로 바람을 막아가며 동료와 부둥켜안고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몸으로 부딪쳐서라도 깨우치고 완수해내야 했다. 자유분방했던 대학생이 몇 달 만에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뭐든 척척 해내게 됐다.
만일 그때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 ‘못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순간 마음은 부정적으로 바뀌고 결국 실패와 패배의식에 익숙해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다. 안 되면 되게 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결과는 항상 기대 이상으로 나왔다. 이런 경험이 쌓여 ‘귀신 잡는 해병’으로 거듭났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군생활을 통해 나도 모르던 내 안의 또다른 나를 발견하게 됐다. 스스로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는 에너지, 그것은 바로 ‘야성’이었다.
해병대에서 다져진 도전정신과 야성은 고비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다. 잘나가던 관료생활을 접고 코리안리재보험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기로에 서 있던 회사를 살리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직원의 30%를 구조조정했다. ‘아니다, 안 된다, 현실은 그게 아니다’라며 자꾸만 뒤로 빼는 부정적 기업문화도 바꾸기 시작했다.
직원들의 저항도 있었다. 기회만 되면 ‘이제 다 바뀌었으니 적당히 하자’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군대의 잔반통 이야기를 했다. 오만가지 더러운 찌꺼기가 섞인 잔반통도 며칠 지나면 찌꺼기가 가라앉고 맑은 물이 떠오르지만 한번 흔들면 바닥의 찌꺼기가 다시 뒤섞인다. 기업문화도 겉으로는 완성된 것 같다가 위기가 닥치면 다시 오합지졸이 되곤 한다. 그러므로 끝없이 혁신해야 한다. 변화를 이끌어가는 본능이 바로 ‘야성’이다.
그렇게 기업문화를 바꿔 나가고 이전까지 엄두도 내지 않던 해외 재보험시장을 개척하며 노력한 결과 세계 30위권 밖에 있던 회사가 10여년 만에 아시아 1위, 세계 10위권까지 올라왔다.
나는 해병대 시절에 겪은 고생이 아직도 너무 생생해 다시 기억조차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젊은 시절에 체득한 해병대 정신이 오늘날의 나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을 확신한다. 내 자신의 한계와 마주한 뒤 다시 움직이게 하는 그 ‘야성’이 바로 해병대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늘날까지 굳건한 경영철학이자 삶의 철학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내가 해병대에 입대한 것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이다. 당시 나 자신을 강하게 단련하고 싶다는 생각에 덜컥 지원했다. 해병대는 입대와 동시에 대부분 베트남전에 투입되던 때라 충격과 걱정에 휩싸인 가족들을 뒤로 한 채 해병 181기로 훈련소에 입소했다. 함께 입대한 동기는 750명. 그 중 500여명이 파병됐고 상당수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부대는 베트남에 가진 않았지만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전장으로 떠나야 했기에 하루하루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이다보니 부대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고참들의 위세도 대단해서 ‘신고 빠따’ ‘기수 빠따’처럼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구타가 반복돼 엉덩이에는 늘 피딱지를 달고 살았다. 한 번은 훈련 후 내무반에 복귀하니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고 담요가 사라졌다.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딱딱한 매트리스로 바람을 막아가며 동료와 부둥켜안고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몸으로 부딪쳐서라도 깨우치고 완수해내야 했다. 자유분방했던 대학생이 몇 달 만에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뭐든 척척 해내게 됐다.
만일 그때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 ‘못한다’고 생각했다면 그 순간 마음은 부정적으로 바뀌고 결국 실패와 패배의식에 익숙해져 갔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다. 안 되면 되게 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결과는 항상 기대 이상으로 나왔다. 이런 경험이 쌓여 ‘귀신 잡는 해병’으로 거듭났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군생활을 통해 나도 모르던 내 안의 또다른 나를 발견하게 됐다. 스스로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는 에너지, 그것은 바로 ‘야성’이었다.
해병대에서 다져진 도전정신과 야성은 고비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다. 잘나가던 관료생활을 접고 코리안리재보험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기로에 서 있던 회사를 살리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직원의 30%를 구조조정했다. ‘아니다, 안 된다, 현실은 그게 아니다’라며 자꾸만 뒤로 빼는 부정적 기업문화도 바꾸기 시작했다.
직원들의 저항도 있었다. 기회만 되면 ‘이제 다 바뀌었으니 적당히 하자’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군대의 잔반통 이야기를 했다. 오만가지 더러운 찌꺼기가 섞인 잔반통도 며칠 지나면 찌꺼기가 가라앉고 맑은 물이 떠오르지만 한번 흔들면 바닥의 찌꺼기가 다시 뒤섞인다. 기업문화도 겉으로는 완성된 것 같다가 위기가 닥치면 다시 오합지졸이 되곤 한다. 그러므로 끝없이 혁신해야 한다. 변화를 이끌어가는 본능이 바로 ‘야성’이다.
그렇게 기업문화를 바꿔 나가고 이전까지 엄두도 내지 않던 해외 재보험시장을 개척하며 노력한 결과 세계 30위권 밖에 있던 회사가 10여년 만에 아시아 1위, 세계 10위권까지 올라왔다.
나는 해병대 시절에 겪은 고생이 아직도 너무 생생해 다시 기억조차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젊은 시절에 체득한 해병대 정신이 오늘날의 나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을 확신한다. 내 자신의 한계와 마주한 뒤 다시 움직이게 하는 그 ‘야성’이 바로 해병대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늘날까지 굳건한 경영철학이자 삶의 철학으로 자리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