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자' 오자와…2일 4번째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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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증세파 징계에 '반발'
동조 의원 55명 넘을 땐 총선 다시 실시해야
동조 의원 55명 넘을 땐 총선 다시 실시해야
일본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민주당 대표(사진)는 당을 깨고 새로 만드는 데는 ‘선수’다. 그래서 별명도 ‘파괴자(壞し屋)’다. 신당 창당 경력만 세 번이다.
그런 오자와가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명분은 ‘반(反)증세’다. 지난달 26일 민주당 지도부가 소비세(부가가치세) 인상법안을 밀어붙인 것에 대한 반발이다. 그는 이르면 2일 탈당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신당 창당을 본격화할 전망이다. 오자와를 따라나서는 의원이 55명을 넘으면 민주당은 과반 의석 여당 자리를 잃게 된다.
요미우리신문은 1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당내 증세 반대파를 징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오자와 그룹의 집단 탈당이 불가피해졌다”며 “오자와 그룹도 이르면 2일까지 결론을 내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이제 공은 오자와 쪽으로 넘어왔다. 얼마나 많은 의원을 탈당 대열에 끌어들이느냐가 관건이다. 중의원 의석 수는 총 478석(결원 1명과 의장 제외). 이 중 민주당은 293석을 차지하고 있다. 55명 이상이 탈당하면 과반이 무너진다.
오자와 그룹이 자민당 등 야당과 손잡으면 내각불신임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되면 집권당은 관행적으로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고 다시 총선거를 실시한다.
오자와가 정계에 발을 들인 건 27세 때인 1969년. 중의원 의원이던 부친이 급사하면서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정계 입문 이후 그는 큰 판을 읽는 정치감각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승승장구했다. 49세에는 자민당을 좌지우지하는 간사장 자리에까지 오르며 ‘황태자’로 불렸다. 그러나 1993년 소선거구제 도입, 관료 배제 정치 등 개혁 안건이 자민당 지도부와 충돌하자 탈당했다. 44명의 계파 의원을 이끌고 신생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꾸렸다. 이때부터 일본의 정치구도는 ‘보수 대 진보’에서 ‘오자와 대 반(反)오자와’로 틀이 바뀌었다.
한번 불이 붙은 파괴 본능은 1년을 참지 못했다. 1994년에는 9개 계파의 214명을 묶어 신진당을 결성했고, 1997년에는 다시 자유당이라는 새 간판을 걸었다. 2004년엔 민주당과 손잡고 자민당 55년 체제를 무너뜨리는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네 번째 탈당을 둘러싼 환경은 만만치 않다. 아사히신문 여론조사 결과, 오자와 신당에 대해 일본 국민의 78%가 “기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민주당 최대 지지단체인 일본노총 ‘렌고(連合)’도 반대를 선언했다. 내년 4월까지는 정부교부금 없이 신당을 꾸려야 하는 점도 걸림돌이다.
정치자금법 위반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최근 이혼 의사를 밝힌 부인이 원전 사고 때 오자와가 피신하려 했다고 폭로한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다. 산케이신문은 “오자와의 신당 창당이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그런 오자와가 다시 소매를 걷어붙였다. 명분은 ‘반(反)증세’다. 지난달 26일 민주당 지도부가 소비세(부가가치세) 인상법안을 밀어붙인 것에 대한 반발이다. 그는 이르면 2일 탈당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신당 창당을 본격화할 전망이다. 오자와를 따라나서는 의원이 55명을 넘으면 민주당은 과반 의석 여당 자리를 잃게 된다.
요미우리신문은 1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당내 증세 반대파를 징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오자와 그룹의 집단 탈당이 불가피해졌다”며 “오자와 그룹도 이르면 2일까지 결론을 내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이제 공은 오자와 쪽으로 넘어왔다. 얼마나 많은 의원을 탈당 대열에 끌어들이느냐가 관건이다. 중의원 의석 수는 총 478석(결원 1명과 의장 제외). 이 중 민주당은 293석을 차지하고 있다. 55명 이상이 탈당하면 과반이 무너진다.
오자와 그룹이 자민당 등 야당과 손잡으면 내각불신임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되면 집권당은 관행적으로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고 다시 총선거를 실시한다.
오자와가 정계에 발을 들인 건 27세 때인 1969년. 중의원 의원이던 부친이 급사하면서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정계 입문 이후 그는 큰 판을 읽는 정치감각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승승장구했다. 49세에는 자민당을 좌지우지하는 간사장 자리에까지 오르며 ‘황태자’로 불렸다. 그러나 1993년 소선거구제 도입, 관료 배제 정치 등 개혁 안건이 자민당 지도부와 충돌하자 탈당했다. 44명의 계파 의원을 이끌고 신생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꾸렸다. 이때부터 일본의 정치구도는 ‘보수 대 진보’에서 ‘오자와 대 반(反)오자와’로 틀이 바뀌었다.
한번 불이 붙은 파괴 본능은 1년을 참지 못했다. 1994년에는 9개 계파의 214명을 묶어 신진당을 결성했고, 1997년에는 다시 자유당이라는 새 간판을 걸었다. 2004년엔 민주당과 손잡고 자민당 55년 체제를 무너뜨리는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네 번째 탈당을 둘러싼 환경은 만만치 않다. 아사히신문 여론조사 결과, 오자와 신당에 대해 일본 국민의 78%가 “기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민주당 최대 지지단체인 일본노총 ‘렌고(連合)’도 반대를 선언했다. 내년 4월까지는 정부교부금 없이 신당을 꾸려야 하는 점도 걸림돌이다.
정치자금법 위반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최근 이혼 의사를 밝힌 부인이 원전 사고 때 오자와가 피신하려 했다고 폭로한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다. 산케이신문은 “오자와의 신당 창당이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