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조원에 이르는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2001년 10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하이닉스반도체는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 채권단 주도의 매각으로 경쟁사 미국 마이크론과 독일 키몬다에 핵심 라인을 공개하고 실사를 허용해야 했다. 2001년 말에는 마이크론이 새 주인으로 확정됐다. 이듬해 5월 열린 이사회에서 기술 유출을 이유로 매각 건을 부결시켜 한국 기업의 운명을 가까스로 이어갔다.

‘하이닉스’라는 이름은 오랜 기간 부실 기업의 대명사처럼 굳어져 버렸다. 4년간의 워크아웃과 10년 매각 작업 무산이 남긴 멍에였다.

지난 2월 SK그룹이 인수한 뒤 ‘SK 날개’를 단 하이닉스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달 들어 미국 IBM과 차세대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고 이탈리아 반도체 회사인 아이디어플래시를 사들였다.

20일에는 3000억원가량을 투입해 미국 반도체 회사인 LAMD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 반도체업계는 2001년 마이크론에 넘어갈 뻔했던 SK하이닉스가 쓰고 있는 ‘대역전 드라마’에 긴장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미국 LAMD를 인수한 것도 새 시장 창출을 위한 승부수로 꼽힌다. LAMD는 2004년 미국 샌타클래라에 설립된 반도체 연구·개발(R&D) 회사로, 연구원은 120여명이다. SK하이닉스는 2억4700만달러를 들여 기술과 인력, 자산 등을 100% 흡수하기로 했다.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 낸드플래시를 활용해 저장장치를 만들 때 필수적인 컨트롤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 회사다.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와 저장장치를 연계·제어하는 두뇌 역할을 하는 컨트롤러는 낸드플래시의 속도와 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권오철 SK하이닉스 사장은 “컨트롤러 설계 능력이 낸드플래시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척도로 떠올랐다”며 “LAMD 인수를 통해 SK하이닉스의 낸드플래시 경쟁력이 한층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 주식은 이날 증권시장에서 3.98% 급등한 2만4800원에 거래를 마쳤다. LAMD 인수로 낸드플래시 등 제품의 부가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게 시장의 평가다.

SK하이닉스의 ‘속전속결’식 과감한 변신은 강력한 오너십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이닉스 회생을 이끌었던 김종갑 한국지멘스 회장은 “하이닉스는 주인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었다”고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하이닉스가 그룹 내 신성장동력으로 빨리 자리잡을 수 있도록 인수·합병(M&A)을 포함한 과감한 투자를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치킨게임(무한 가격 경쟁)에서 밀려 파산보호를 신청한 일본 엘피다메모리가 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활로를 열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SK하이닉스 고위 관계자는 “컨트롤러 업체 인수는 몇 년 전부터 검토해 왔으나 채권단 관리 아래에서 수천억원이란 돈을 쓰기는 불가능했다”며 “지난 13일 이사회에 최 회장이 직접 참석해 찬성표를 던지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인수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지난해보다 20% 늘어난 4조2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