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한 한국보며 그들도 희생의 가치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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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6·25 참전용사 초청한 새에덴교회 소강석 담임목사
교회 부담해 300명 초청…민간 외교관 역할
성장이 교회 목적될 순 없어…나눔과 섬김이 더 큰 성공
교회 부담해 300명 초청…민간 외교관 역할
성장이 교회 목적될 순 없어…나눔과 섬김이 더 큰 성공
오는 24일 경기도 용인 죽전동 새에덴교회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미국과 필리핀의 6·25전쟁 참전용사와 가족 등 48명이 교회 초청으로 방한,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 새에덴교회의 참전용사 초청은 올해로 6년째를 맞는다. 2007년부터 매년 6월 미국 참전용사들을 초청, 피로써 이 땅을 지켜준 은혜에 보답하는 행사를 마련해왔다.
올해부터는 미국 외 국가의 참전용사들도 초청키로 해 필리핀 참전용사와 가족 등이 오는 22~28일 방한해 국립현충원과 판문점, 전쟁기념관, 서울타워, 삼성전자, 한미연합사령부와 천안함이 전시돼 있는 평택 해군 제2함대 등을 방문할 예정이다. 정부 기관도, 교단도 아닌 일개 교회가 적잖은 비용이 들어가는 행사를 왜 해마다 열까. 소강석 담임목사(50)를 교회에서 만났다.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2006년 7월 미국 백악관 신우회 예배에 초청돼 갔을 때였어요. 그래서인지 백악관 직원들과 미군 장성들이 한국을 많이 원망하더군요. 6·25전쟁 때 수많은 미군들이 목숨을 바쳐 한국을 도왔는데, 왜 그렇게 미국을 미워하느냐는 것이죠.그래서 참전용사들을 한국에 초청해 보답하겠다고 약속했죠.”
▷지금까지 초청한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작년에만 100명을 초청했고, 전부 더하면 300명이 넘습니다. 그만큼 사연도 많죠. 2010년에 방문했던 분은 자신이 강력하게 권유해 친구 3명과 참전했는데, 친구들은 다 전사하고 자신만 살아남아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한국인들의 뜨거운 감사와 우정을 확인하고, 한국의 발전한 모습을 보니 마음의 짐을 풀고 갈 수 있게 됐다며 우셨어요. 자신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는 거죠.”
▷초청 대상은 어떻게 선정하나요.
“한국인이 정치를 하거나 친한파 정치인이 있는 지역에서 많이 선정합니다.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하고 한국인 비자면제프로그램 제정에 앞장선 조지 앨런 전 상원의원의 지역구인 버지니아주에서 수십 명을 초청하기도 했죠. 그랬더니 이분들이 돌아가서 지역 TV와 신문, 이메일 등으로 얼마나 소문을 냈던지 작년에 워싱턴보훈병원에 가서 한국의 새에덴교회에서 왔다니까 간부들이 다 알더라고요. 독도 문제가 대두됐을 때도 이분들이 부시 전 대통령과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는 등 큰 역할을 했죠.”
교회가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새에덴교회는 정부가 주관하는 보은행사와 달리 항공비와 체제비 일체를 부담한다. 올해는 특히 미국 외에 필리핀 참전용사까지 초청해 일이 더 많아졌다.
▷필리핀을 초청 대상 국가로 추가한 까닭이 있습니까.
“필리핀 사람들은 평균수명이 짧아서 참전용사들이 대부분 돌아가시고 100명도 안 남았어요. 6·25전쟁 당시 필리핀은 1946년 독립 이후 줄곧 공산반란군과 교전상태에 있어서 국내 정세가 매우 불안했어요. 그런데도 유엔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하자 전차 17대를 포함해 7400여명의 전투병을 파견해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전사 116명, 실종 16명, 부상 299명의 희생자를 냈어요.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요.”
▷필리핀 참전용사들도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이번에 참전용사들이 오시면 오는 22일 고양시 관산동에 있는 필리핀군 참전기념비에 헌화를 하실 텐데, 감회가 크겠죠. 6·25전쟁 당시에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더 잘 살았는데….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도 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했죠. 그분은 올해엔 국내 행사 때문에 못오지만, 내년에는 꼭 오시기로 했어요. 이날 행사에는 루이스 크루즈 주한 필리핀 대사, 한국인으로 귀화해 이주민 출신 첫 국회의원이 된 이자스민 의원도 참석할 겁니다.”
소 목사는 보은을 통한 교육이 다음 세대와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교회 안의 일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참전용사 초청 기간에는 교회 어린이들에게 6·25전쟁 관련 글짓기와 그림전, 웅변대회도 연다. 그런데도 일부에선 참전용사 초청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다.
▷교회가 정치적인 일을 한다는 비판도 있을 법한데요.
“뭐든 부정적으로 보면 한이 없죠. 하지만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성장했는데, 우리끼리만 좋아하고 만족하면 사회적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성장한 만큼 역사를 섬기는 모습을 보여줘야죠. 과거 역사를 기억하고 섬길 때 미래의 좌표도 보이는 것이니까요. ”
▷북한을 자극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습니까.
“6·25전쟁을 상기하는 게 북한을 자극하는 건 아니죠. 북한을 동족으로서 사랑하고 인도주의적으로 돕는 것과 그 체제를 좋아하는 건 다르니까요.”
▷요즘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 생각이 남다르시겠습니다.
“한 사회에는 당연히 진보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보가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도덕성과 윤리성, 성실과 정직 같은 덕목을 갖춰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북한은 동족으로서 당연히 사랑해야 하고 인도적 지원은 해야 하지만 북한체제, 3대 세습에 대해 대답하기 곤란하다고 하면 비겁한 겁니다. ”
소 목사는 교회 개척 20여년 만에 신자 3만명이 넘는 대형 교회를 일궜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대형 교회가 아니다. 그는 “교회 성장 그 자체가 목적이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교회든 사람이든 성공한 다음이 중요하다는 것. 그는 “성공 다음의 더 큰 성공은 나눔과 섬김”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돈을 모아서 뭐할 겁니까. 교회에 돈을 쌓아두면 싸우기만 해요. 우린 돈을 쌓아두지 않으니 그런 일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려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소강석 목사는
유교집안서 성장…'무소유'정신 몸소 실천…5권 시집 출간한 시인
전북 남원의 지리산 자락 산골 출신인 소강석 목사는 스스로 ‘3M 목회자’라고 자처한다. 맨땅에서 맨몸, 맨손으로 교회를 일궜다는 얘기다.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목사가 되겠다고 했다가 19세에 집에서 쫓겨났다. 노점상과 막노동 등 고학으로 신학을 공부했고, 1988년 서울 가락동의 76㎡짜리 지하 공간에 월세를 얻어 교회를 개척했다. 2005년 현재의 용인 죽전동으로 이전, 신자 3만5000여명의 대형 교회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새에덴교회는 여느 대형 교회처럼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다. 그는 지금도 카니발을 타고 2년 전에야 처음 집을 장만했다. 그것도 교인의 집이 경매로 헐값에 넘어갈 위기에 놓이자 대출을 받아 인수했다.
‘무소유’로 살고 싶어하는 그에게도 욕심은 있다. 책이다. 교회 안 그의 서재엔 여느 도서관만한 2만여권의 장서가 있다. 그는 “책은 나의 연인이요, 글은 나의 고독한 동행자였다”고 말한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그는 지금까지 5권의 시집 등 30권의 책을 썼다. 민간외교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국민훈장동백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미국의 외국참전용사회(VFW)가 주는 금훈장, 마틴 루터 킹 국제평화상 등을 수상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